환단고기의 진실35-환단고기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동명왕의 정체
환단고기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동명왕의 정체 : 동명과 주몽은 다른 인물
동명신화는 최초의 기록인 <<논형>>(1세기)부터 6세기 문헌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아닌 부여의 건국신화로 구분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동명왕편> 등에서는 주몽의 건국신화로 되어있다.
따라서 동명이 어떻게 왜곡됐느냐, 하는 실체가 오직 <<환단고기>><삼성기>에서만 밝혀지고 있다.
BCE108년 한나라 무제가 요하의 우거정권(우거는 번조선을 찬탈한 위만의 손자)을 멸한 뒤 군현을 설치하고자 대군을 동원하여 동방(당시 북부여)을 침략했다. 이 때 거국적으로 위병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한족 침략군을 막아낸 북부여의 구국영웅이 고두막한이다.
고조선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손인 그는 거병에 앞서 졸본에서 동명왕으로 즉위하였고, 훗날 민심을 얻어 북부여 5대단군에 즉위하였다. 고두막학은 동명이라는 나라의 왕 (동명왕)으로 22년간 재위하였고 북부여 5세 단군(고두막 단군)으로 27년간 재위하였으나 합하여 49년간 왕과 단군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동명은 흔히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의 묘지명에 "옛날에 동명은 이군에 감응되어 표천을 건넜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昔者 東明感氣 踰俵川而啓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
제작년 : 702년(주(周) 측천무후(則天武后) 장안(長安) 2년).
출토 및 소장 : 1922년 낙양 출토, 북경대학교 원고고학실 소장.
형 태 : 정방형. 탁본 – http://goo.gl/CCq57
大周故金紫光祿大夫行營繕大匠上護軍遼陽郡開國公泉君墓誌銘幷序」
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昔者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朱蒙孕日臨浿水」
而開都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雖星辰海嶽莫繫於要荒而俎豆詩」
書有通於聲敎承家命氏君其後也乃高乃曾繼中裏之顯位惟祖惟禰傳
대주(大周)의 고(故)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영선대장(行營繕大匠) 상호군(上護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要荒]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爼豆]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씨(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천(연)남산 묘 관련 자료 http://www.dragon5.com/news/news2005101802.htm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김천령金千齡(연산군때의 문관)은 자신이 지은 부에서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 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하였다.
다른 역사 기록서인 <만주원류고> 권1 부여조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부여는 색리에서 나왔는데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색리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동명은 (색리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은 역시 (동부여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이르렀다. 高麗出自夫餘 夫餘出自索離 夫餘在高麗北 索離又在夫餘北 故東明南走而至夫餘 朱蒙亦南走而至高麗 ”로 기록되어져 있다.
역사스페셜 동명루트를 찾아서 편에서는 동명을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부여의 건국시조가 동명왕이다. 그동안 동명왕을 주몽으로 알고 있던 우리에게 조금 당혹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동명왕편을 비롯한 여러 사서들에선 주몽을 동명왕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12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몽은 추모왕이나 추모성왕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전 그 언제부턴가 동명왕으로 불렸을 테고 지금으로선 그 시기를 정확인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왜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과 같은 이름을 같게 됐는지 또 건국신화 역시 비슷한 내용을 갖게 됐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한 가지 있습니다. ‘朱蒙自北夫餘道難 至卒本夫餘’ 즉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입니다. 주몽이 다름 아닌 부여출신이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강한 부여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자 그렇다면 고구려의 이처럼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동명왕이 세운 나라 부여. 과연 이 부여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동명이 걸었던 길을 찾아 나선 2천 킬로미터의 대장정. 거기엔 우리 고대국가들의 뿌리 부여가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에 이르기까지 부여는 우리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고 그들에게 동명왕이라는 존재는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고대 이래로 우리민족에게는 바로 동명왕의 후예라는 생각이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잊어진 부여사를 하루 빨리 복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여 동명왕의 실체를 찾고 그 위상을 회복하는 일은 바로 우리의 근원을 되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 역사스페셜 동명루트를 찾아서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527
한무제를 물리친 북부여의 구국 영웅, 고두막한
<북부여의 제 5세 단군 고두막한: 사진출처=다물넷>
한무제의 위만조선 침략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한무제의 북부여 침략과 고두막한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해 왔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였다. 그러고는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어
(BCE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였다.
①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자칫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한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동명왕은 구국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의 5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②
원래 북부여의 4세 단군을 계승하여
잠시 보위에 있었던 해부루는 동쪽의 차릉(가섭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③를 세웠다.
이로써 부여는 동서로 나뉘게 되고 후기 북부여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두막한의 등장으로 전기 북부여 시대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북부여는 고두막한의 다음 대에 이르러 180년(BCE 230~ BCE 58)의 짧은 역사를 끝내게 된다.
고조선의 계승자, 북부여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이다.
그런데 강단 사학자들은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설정하였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다.
206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왜 북부여사는 이렇게 난도질되었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것에서 비롯된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으며,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결과이다.
<후한서>, <삼국지> 등의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삼국지] <동이전>에 나와 있는 울구태, 간위거, 마여, 으려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이러하건만 강단사학계에서 나오는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도면서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에 제대로 연결되는 그 날이 바로 동방 배달민족사의
9천 년 국통 맥이 온전하게 똑 바로 서는 역사 광복의 날이 될 것이다.
각주)
① 동명왕 : 고두막한은 고조선의 47세 고열가 단군의 직계 후손이라 한다.
동명왕이란 칭호는 '동방東의 광명明을 부활시킨다'를 뜻한다.
한무제를 물리쳐 고조선의 위엄과 영광을 되찾고자한 그의 구국 의지가 나타나 있다.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사의 전모믈 모르는 현 역사학계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김천령金千齡(연산군 때의 문관)은 자신이 지은 부賦에 서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
<東明創其緖業, 朱夢承其餘波>"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하였다.)
② 북부여사 전체를 역사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동명왕 고두막한에 관련된 내용이 한민족사
국통이 끊어진 핵심으로 지금의 역사 교과서에서 가장 잘못된 내용 중의 하나이다.
③ 동부여 : 제후로 강등된 해부루는 국상 아란불과 함께 가섭원(지금의 러시아 오소리강 지역)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 라고 한다.
동부여는 2대 금와를 거쳐 3대 대소 때에 고구려에 망하여 갈사부여와 연나부부여로 나우어졌다.
갈사부여는 대소왕의 아우가 갈사수葛思水(지금의 두만강 유역)에서 세운 부여이다.
연나부부여는 대소왕의 종제가 연나부(지금의 요령성 개원)에 세운 부여로,
모국인 동부여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부여'라고도 부른다.
환단고기 역주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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