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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상제문화의 수호자, 낭가(郎家)-[증산도 상생방송]

by 바로요거 2012. 1. 17.

★상제문화의 수호자, 낭가(郎家)-[증산도 상생방송]

 

「STB특별기획 상제문화, 상제문화를 찾아서」제6편

 

@ 경술국치 100년, 일본의 진위는?

 

 지난 8월 일본 간 나오토 총리는 경술국치 100년 담화문에서 “식민지 지배 한국인의 뜻에 반했다”라고 했다. 일본의 변화를 기대하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중국을 견제하고 자위대를 개편하기 위한 정치적인 포석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군사대국화하려는 조짐을 보여 왔고, 최근에는 한미군사훈련에 자위대 장교를 파견하는 등 “전쟁을 할 수 있는” 밑그림들을 치밀하게 준비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2차 대전 종결이후 미국의 묵인아래, 전범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일본의 재건을 주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정치권력을 지속해 오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를 왜곡하고, 평화헌법의 개헌을 주장하는 우익집단을 후원하면서 한편 미국의 新안보전략 아래에서 과거 일본의 영광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우경화를 조사해가다 보면, 생각보다 오래된 역사적배경이 있음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일본의 국학國學파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과장과 허구가 뒤섞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의 내용을 근거로 진구황후의 신라정벌설과 임나일본부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정한론으로 발전시켰다.

 [상제문화를 찾아서-6편]에서는 일본의 왜곡된 국학을 비판하며 진정한 국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6천년 한민족사의 국학의 계승자들은 누구였으며,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 국학國學이란 무엇인가?

 

 국학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나라의 고유한 역사, 언어, 풍속, 신앙, 제도, 예술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정의대로라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자의식을 마련해주는 것이 국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국학적 풍토가 살아 있을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한 방송사 에서 서울시내 중상위층 고등학생 3학년을 대상으로 중학교 수준의 역사문제를 제출해 평가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정답률은 59%에 그쳤다. 심지어 일본과 영유권 분쟁이 있는 섬, 독도에 대한 문제의 정답률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서울대가 국사를 필수로 정하면서 오히려 국사과목이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근본문제는 “교육현장에서 한국사를 추방해버린 것이다.”라고 조광(고려대사학과)교수가 평한 것처럼, 국사과목이 선택과목이 된 현행 교육체계 자체에 있을 것이다. 

 

고려말, 지금의 국무총리 급인 최고관직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었던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은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爲國之道가 莫先於士氣하고 莫急於史學은 何也오

史學이 不明則士氣가 不振하고

士氣가 不振則國本이 搖矣오 政法이 岐矣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선비의 기백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사학보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이 분명하지 못하면 사기를 진작시킬 수 없고, 사기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 序』


 행촌 이암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근본법도가 사기士氣, 즉 민족 지도자들의 기상보다 중한 것이 없고, 그러기 위해 사학史學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우리의 현행 교육체계는 도리어 민족의 기상을 죽이는 사학死學이 되고 말았나 보다. ‘나라國는 형체形와 같고, 역사史는 혼魂과 같으니 그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겠는가’라는 그의 물음에 떳떳이 고개 들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없는 역사마저 만들어낸 것이 일본의 국학파다.

 

@ 일본의 허구적인 역사관 & 한국의 무관심한 역사관

 

 와타나베 겐과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마지막 사무라이』를 떠올려보자. 여기 등장한 마지막 사무라이의 실제 주인공은  바로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다. 영화 속에는 부패한 개화파에 대항해 왕을 지키려는 존왕양이파의 충성심을 그렸지만, 실상 그는 조선을 정벌하는 것이 일본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왜곡된 국풍주의자였다.


 “Boys, Be Ambit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 말은 미국인 윌리엄 클라크가 자신을 배웅하러 온 일본인 학생들에게 해준 말이다. 그런데 그가 설립한 학교에서 그 명언을 가슴에 품고 왜곡된 야망을 키운 이가 바로 니토베 이나조(1862~1933)이다. 그 또한 임나일본부설과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설을 기정사실화 하고,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를 일본에 조공을 바친 행위로 해석하여 조선에 대해 삐뚤어진 관점을 심어준 인물이다. 또한 《무사도》정신을 일본인의 정체성으로 확립한 이가 바로 니토베 이나조이다. 이 무사도 정신은 20세기 초 일본의 패권주의와 결합되어 가미가제나 일억옥쇄一億玉碎1)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유린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또 한 명,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의 주인공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명성황후 시해의 배후인물 이노우에 가오루 등 조선 병탄의 주역들을 양육한 스승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요시다 쇼인(1830~1850)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의 좌절을 극복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실질적인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존왕사상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일왕이 중국의 천자보다 훨씬 우월한 존자라고 역설했다. 본래의 천자국인 한민족은 유가의 사대주의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조선의 성리학을 전수받은 일본은 도리어 일왕을 천자보다 더 높였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베신조 전 일본총리는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길러내었던 야마구치현은 ‘메이지의 산실’이라 불리며 간 나오토 현 일본총리를 비롯한 9명의 총리가 배출된 곳이다. 지금도 그를 모신 신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처럼 일본국학파의 특징은 왜곡된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근거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일본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성된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들이 주장한 정한론은 현재 일본 우익 사상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요시다 쇼인                                                             진구황후대일본사략도회


 식민사관의 태두라 비판받는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1873~1961)마저도 <일본서기>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허구라고 말했다. 본래 일본은 배달국과 고조선 이래 삼국으로부터 도래한 한민족이 정권을 수립하여 성립되었다. 진구황후설의 배경이 되는 때에는 신라를 공격할 만한 정치적 세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의 최초 정치적 세력인 야마토 정권은 백제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헤이안平安 시대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고대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인 기내 지방의 1,182개 성씨 가운데 한반도에서 이주한 성씨로 확인된 것만 해도 무려 324개나 된다. 또 『속일본기續日本記』에는 기내畿內 지역 인구의 80~90%가 백제인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한반도에서 문물을 전수받아 이룩한 일본고대사의 실체가 단순한 문화 전수 차원을 넘어서 한민족사의 이주사였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다.

 - 『개벽실제상황』 안경전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일본의 오래된 역사 콤플렉스가 정한론이라는 왜곡된 국풍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학이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자의식을 고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나 민족을 침해할 권리는 없음이다. 그러나 이런 주변국의 역사왜곡을 그들의 책임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중국의 동북공정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여기에는 우리자신 스스로가 역사와 역사를 만들어온 정신사를 왜곡하고 망각한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주변 국가들의 한국사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혹시 그들만의 욕심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은 없었는가에 대해 냉철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일찍이 우리 국학의 철학적 줄기가 될 수 있는 신교적(神敎的 혹은 道家的) 역사의 전통은 우리 위정자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인멸되었으며, 일제 식민지사관의 논리적 도구로 원용된 실증주의사학의 명분 앞에 우리 상고사의 대부분이 민족사에서 소외된 것이다.

- 김동환/(사)국학연구소


 흔히 말하는 반만년 한민족사, 그러나 실제 그 보다 수천 년이나 더 장구했던 한민족의 역사 속에 과연 국학國學이 없었을까?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한 사건을 통해 들여다보자.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한 단재 신채호의 평가이다. 그가 이와 같은 파격적인 평가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王師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 신채호/조선사 연구초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단순한 난이 아니라, 국풍파와 사대파의 정치상 투쟁이었으며, 여기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기 때문에, 이후 조선사가 사대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는 독립적, 진취적이었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고려와 조선사를 통틀어 제일대사건이라고 평한 것이다.

 역사학자라면 듣기 거북한 말일지 모르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라틴 속담이 있다. 묘청세력을 제압한 김부식은 고려 당시의 국사國史를 감수하는 동시에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유가사대주의 사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단재는 ‘병화兵火보다도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불살라 없애버린 것이다.’라고 개탄하며, 김부식이 한민족의 고대사와 국풍을 알 수 있는 기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본국에서 전래하는 <선사仙史>, <화랑기花郞記> 등을 말살하고 연대를 뒤집었다고 비판했다.

 김부식이 유가들의 사대모화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낭가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 왜곡시켰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단재는 한민족의 국학, 국풍을 구체적으로 낭가郎家라고 말하고 있다. 낭郎, 한번쯤 들어봄직한 귀에 익은 표현이다. 어디에서였을까?

 

 

낭郎이란 곧 신라의 화랑을 말한다. 화랑은 본래 상고시대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 곧 그 때는 「선비」라 불렀는데, 고구려에서는 조의(皂衣:검은색의 옷)를 입었으므로 조의선인이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그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였다. 화랑을 국선, 선랑, 풍류도, 풍월도 등으로도 불렀다.

 - 신채호/조선사연구초

 

 바로 김유신, 관창 등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화랑의 낭郎이다. 그런데 국학이라 함은 신라나 고려 등  한 왕조에 국한 된 것이 아니요, 한민족의 국통 맥과 더불어 민족사를 지속시켜온 혼백이어야 할 것이다. 화랑과 조의선인처럼 나라에 따라 그 이름을 비록 달리하였지만, 시대를 넘어 지속되어온 낭가의 정신과 사명은 무엇이었을까?


@ 상제문화의 수호자 랑(郎)

 

 고운孤雲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선교(仙敎, 또는 풍류風流)가 그것이다(國有玄妙之道, 仙(敎風)流是已)’라고 하였다. 본래 한민족에게는 태고로부터 유불선의 모체가 되는 현묘한 도가 있었으며 이를 풍류라고 했다는 것이다. 풍류란 어떤 의미일까?


 풍류風流란 신의 생명과 신도의 기운을 말한다. 신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만물을 움직이는 신령스러운 존재이므로 신교문화에서는 신은 바람과 같다고 말해왔다.

 - 안경전 종정님 道訓


 최치원은 유, 불 양교를 출입하는 동시에 또한 화랑도의 대요를 섭렵한 인물로 삼신상제님을 모셔온 신교문화의 도를 풍류라 말한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화랑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만 이는 후대의 일로 화랑도는 한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교의 바탕에서 성립된 것이다.

 기나긴 세월 온갖 외침 속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원동력이 바로 낭가의 상무정신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낭가의 상무정신이 인류의 뿌리종교인 신교의 삼신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1455~1528)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 ‘낭郎은 곧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郎者卽三神守護之官也’라 하였다.

 여기에서 화랑이 전투 집단의 성격을 넘어 제사를 주관한 관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가 위급한 때는 나아가 공을 세웠지만, 본래는 제관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이는 화랑이전에 원화源花(源은 원래라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는 제관인 아노는 여성으로서 제사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산신들도 여성신이었고, 승려들도 여승인 비구니가 많았다. 그런데 이같이 화랑의 군사적 성격만 부각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국립중앙박물관 최광식 관장은 이것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화랑을 원시공동체사회에서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전사단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단재는 화랑의 신앙적 측면과 군사적 성격 두 가지 모두 착안하여 소도를 지키는 무사단으로 본 반면 식민사학자들은 우리의 고대사회가 남방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보다 후진적이란 관점에서 본 것이다.

 즉 화랑의 기원을 남태평양의 원시집회소에서 찾음으로서 신라 진흥왕대를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사대주의사관에서부터 식민주의사관을 거치는 동안 한민족의 역사만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제문화를 수호해왔던 신교문화의 낭가정신마저 왜곡된 것이다.


@낭가의 맥

 

 신라 진평왕 때의 도승道僧으로 신라 십성十聖 중 한 사람인 안함로安含老(579~640)와 고려 때 인물로 추정되는 원동중元董仲은2) 인류 시원국가 환국으로부터 신시배달과 단군조선 그리고 북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동방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기록한 『삼성기三聖記』를 통해 낭가의 역사적 뿌리를 밝혀주고 있다.


於是에 桓雄이 率衆三千하사 降于太白山頂神檀樹下하시니

謂之神市오 是謂桓雄天王也시니라

환웅께서는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 마루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 『삼성기三聖記』 下, 원동중


 환웅천황께서 동방의 새 역사를 개창할 때 환국에서 거느리고 온 문명개척단 3천 명이며 이들을 제세핵랑이라 불렀다.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 시대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와 관료, 제사장, 장교가 모두 미혼의 젊은이들인 낭가에서 나왔다. 그들은 삼신상제님께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신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교의 성소인 소도의 경당扃堂에서 문무에 정신하였다. 단군조의 국자랑, 북부여의 천왕랑, 고려의 선랑, 국선, 재가화상으로 이어졌다. 이후 낭가제도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의 실패로 국풍파가 유학파에게 패함으로서 그 명맥이 쇠잔하게 되었다.

 그러나 낭가의 정신은 나라의 위기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국혼國魂을 밝혔다. 최후의 1인까지 대몽항쟁을 펼친 삼별초에서, 조선시대 진유眞儒의 선비정신에서, 그리고 갑오 동학혁명과 구한말의 항일 구국운동, 광복군의 독립운동에서,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낭가의 정신이 빛을 발하였다.

 문명개척단 3천의 제세핵랑을 이끌고 신시 배달국을 세우신 환웅천제께서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弘益人間), 신교의 삼신 진리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在世理化)를 베푸셨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역사를 확대, 왜곡하는 편협한 전체주의적 국학론과는 전혀 달랐다. 또한 한국학이라든가 조선학 같이 단순히 한 지역이나 시대에 국한된 학문의 수준도 아니었다. 한민족이 동북아의 문명을 처음으로 열고, 또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는 문화 창조의 힘은 이 낭가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교의 적통자 낭가의 상무정신은 하늘과 땅의 광명의 역사를 개척하여 동방겨래의 ‘한’의 뿌리를 밝히고 그 이상을 실현하는 원동력이다. 이는 동방의 9천년 역사를 이끌어온 대한의 혼이요, 삼신문화를 지켜온 한민족의 수호정신이다. 

-개벽실제상황/안경전


  낭가는 곧 “상제문화의 수호자”였다. ‘낭가의 정신을 이어 왔는가, 진정한 한민족의 국학인가’를 가늠하는 잣대는 바로 삼신상제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모셔왔으며, 상제문화를 지켜왔는가에 그 핵심이 있다. 따라서 상제문화를 배제한 국학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신교의 푯대를 다시 세운 동학

 

상제문화를 잃어버린 데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 역사를 망각하고 왜곡한 데에도 원인이 있지만, 물질과 사리에 치우친 문화의식이 하늘과 땅, 천지부모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명의 발전은 생활의 편리와 이기를 누리게 해주었지만, 한편 정신문화는 퇴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사의 전환점인 19C, 세계사의 흐름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제국주의 열강들의 통제할 수 없는 경쟁으로 치닫는다. 조선은 세계열강과 각축장이 되고, 정한론을 내세운 일제는 호시탐탐 침략의 야욕을 비춘다.

 이때에 낭가의 맥은 마침내 구한말 최수운 대신사가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받아 동학을 창도함으로써 다시 꽃피우게 된다. 그러나 최수운 대신사의 “시천주侍天主”가르침은 지금 많은 이들이 ‘인내천人乃天’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상제문화를 찾아서] 마지막 7편에서는 동학의 사명과 시천주의 의미를 알아보고, 마침내 인간으로 강세하신 상제님의 강세소식을 만나보자.

 

 

 


1) 본래는 대의나 충절을 위해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의미이나, 일제시대 군국주의 체제에서 자살특공대를 부추기는 구호로 쓰였다.

2) 원동중元董仲에 대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실록에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목록에 그의 이름이 전한다. 고故 이유립 옹은 원동중을 고려 때 인물로 비정하였다.


 

<참고자료>

『개벽실제상황』(안경전), 『단군세기』(행촌이암 찬, 안경전 역), 『삼성기 上,下』(안함로,원동중 찬, 안경전 역), 『일본고대사와 한민족』(김철수), 『조선상고문화사』(신채호 저, 박기봉 역), 『1910,그들이 왔다』(이상각), 『21세기 한중일역사전쟁』(윤대원), 『국사교과서』(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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