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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韓民族史] 한민족 역사! 미스테리일까? 진실일까?

by 바로요거 2011. 10. 15.

[韓民族史] 한민족 역사! 미스테리일까? 진실일까?

 

한민족 역사의 미스테리 같은 진실

-여기 한민족 역사 미스테리 60가지 목록이 있습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그리고 중동에 숨어있는 한민족 역사의 비밀, 부여족과 불가리아에 얽힌 역사의 진실, 중국사서에 나타난 동이족의 역사들..

한민족의 중요한 역사서적을 모두 잃어버려 우리의 거의 모든 역사가 왜곡되고, 조작되고, 그 흔적마저 아물아물~~

그렇지만 아래의 내용을 잘 읽어 보면 안 믿을 수도 없습니다...그것 참~~~

 

한민족 역사의 미스테리같은 진실 60가지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고금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있어야한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불리고 있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있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의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라는 고문헌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北崖子의 <규원사화> 서문 中에서


사실 학계에서 '환단고기'는 위서라고 하여 취급조차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왕따를 당하고 있지요.

사실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닌 한민족 상고시대 역사의 정수가 가득 담긴 정서입니다.

그 사실을 뒷 받침해 주는 이유도 20여 가지가 있습니다.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한민족으로 확실히 한번쯤 꼭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우리 한민족 역사의 정본입니다.

 

[국제칼럼] 중동에 숨어있는 우리 역사의 비밀

[동아일보]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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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서에 나타난 동이족의 역사

국과연「다물」지 통권 제12호('95. 6)에 실린 한국고대사연구소 오순제소장의 글을 간추린 것입니다.

 

국과연「다물」지 통권 제12호('95. 6)에 실린 한국고대사연구소 오순제소장의 글을 간추린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소수민족으로 다루는 고대 동아시아 종족 중에서 우리 겨레의 갈래에 속하는 종족으로는 동이(東夷), 숙신(肅愼), 동호(東胡)가 있다.

 

동이(東夷)

 

동이(東夷)는 협의의 동이광의의 동이가 있는데 협의의 동이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중국의 동부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에 살던 족속으로 중국인들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漢族)과는 다른 이민족을 칭하는 말이며, '동쪽에 있는 이(夷) 즉 큰 활(大弓)을 잘 쓰는 족속'이라는 뜻이다.

 

광의의 동이는 진나라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있는 조선족과 숙신과 동호의 후신은 물론 일본, 유구 등지에 살던 족속들을 ‘동쪽 오랑케'라는 뜻으로 비하하여 화하족우위의 사상(中華思想)에 의거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같은 맥락으로 동이(東夷)라 하였기 때문에 겨레의 갈래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 중국 본토에 남아있던 동이족은 한족에게 동화되었음으로 오랑케의 범주에서 제외

 

협의의 동이는 옛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중국 땅에서 중국 문화의 일익을 맡았던 족속이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산동반도 일원에서 나타나는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용산문화(龍山文化), 청령강문화(청령강문화) 등의 주인이 동이족이다.   특히 용산문화의 갑골(甲骨)은 만주, 한반도, 일본에까지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의 동질성을 입증하며, 가장 오래된 갑골은 서요하 상류의 것으로 신석기 후기인 3,500년 전의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화하족(華夏族) 또는 한족(漢族)이라 하는데 이들의 서안(西安)지방의 신석기 반파유적은 고대중국의 중심이었던 황하 하류 하남성과는 거리가 먼 섬서성 지역이며, 주나라의 발생지 또한 이 지역이었음으로 중국 화하족은 중국대륙의 서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한다.

 

당시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황하하류 산동지역에는 중국의 화하족과 구별되는 동이족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중국의 설화나 고대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여와(女와), 황제(黃帝) 또는 소호(韶濩), 전욱(전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등 소위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하(夏)나라에서 은(殷), 주(周), 진(秦), 한(漢)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복희(伏羲), 신농(神農), 소호(韶濩), 순(舜)은 동이족 사람이며, 은(殷)나라는 동이족이 중심이 되었던 나라로 일려지고 나머지는 화하족(華夏族: 漢族) 또는 그들이 중심이되어 이룬 나라들이다.

 

특히 은(殷)나라의 갑골문(胛骨文)은 한자(漢字)의 기원으로 여겨져 중요시되는데 이는 그 근원이 대문구문화의 토기에 새겨진 그림문자까지 소급되고, 최근 용산문화에서도 이 문자가 나와서 대문구문화 → 용산문화 →은나라 갑골문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이족은 중국사람들에게 시대와 그 분파에 따라 우이, 견이, 풍이, 황이, 방이, 구이, 견이, 백이, 적이, 형이, 양이, 서이, 회이, 사이, 내이, 동이, 개이, 도근 등으로 불리고 있다.

 

시대별로 동이족의 활약상을 정리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동이족의 활약상

 

시 대

동 이 족의 활 동 상

삼황오제 三皇五帝

복희(伏羲)

복희(伏羲)

-역사에 나타나는 동이족의 최초의 인물.

-팔괘를 만들고, 그물뜨기와 고기잡이, 짐승 기르기, 35줄의 비파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신농(神農)

신농(神農)

-농사짓는 법과 약초를 찾아내고, 5줄의 비파를 만들고, 시장을 열었다.

-춘추전국시대 강태공이 그의 후손이다.

황제(黃帝)

치우(蚩尤)

-한족이 시조로 받드는 황제(黃帝)가 가장 두려워했던 군장으로 구이(九夷), 구여(九黎)의 임금, 친형제가 8명, 일가 형제가 73명이었다.

-지금 중국에 있는 묘족(苗族)이 그의 후손, 묘족은 한족보다 먼저 중국에 들어왔으나 후일 한족에게 쫓겨났다.

-요(堯) 때는 그의 신하 회중을 우이(嵎夷)의 땅 양곡(陽谷)에 살게 하였는데 ‘양곡’이란 ‘해가 뜨는 곳’이란 뜻으로 ‘조선(朝鮮)’과 같은 의미이며 지금의 산동지방으로 동이족의 활동지역을 말한다.

하(夏)

태강임금

-동이족이 반(叛)하기 시작

상임금

-견이, 풍이, 황이, 우이와 싸움

소강임금

-방이와 싸움

분,망임금

-구이와 싸움

설임금

-견이, 백이, 적이, 형이, 풍이, 양이와 싸움

은(殷)

중정임금

-남이가 침공

무을임금

-정치가 쇠망하자 동이가 번성하여 회하(淮河)와 태산(泰山)지방인 강소성과 안휘성으로 옮겨와 점점 중토(中土)에 살게 됨.

 

 

시 대

동 이 족의 활 동 상

주(周)

초기

-은나라 후손인 관숙과 채숙이 동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이들을 물리쳤다.

-청주에 우이가 있었는데 그들이 산 지역은 동주로 현재의 봉래이며, 래이(萊夷)는 래주(萊州)에 있었는데 제나라의 땅으로 내이의 제후와 래이인이 살았다.

-내이는 목축으로 생활하였으며 산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짰다. 이곳의 명주실은 특히 질기기 때문에 거문고와 비파의 줄을 만들었다. 중국의 비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산동의 명주가 제일 좋다고 한다. 이것으로 중국의 비단은 동이족으로부터 기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임금

-숙신이 쳐들어 왔다.

-서이(徐夷)가 구이(九夷)와 손잡고 주나라를 물리쳐 서쪽 황하 상류까지 이르렀다.

목임금

-불꽃같이 일어나는 동이를 겁내어 동방 황지에 있는 주나라 땽 500리를 나누어 동이족인 서언왕에게 맡겼다. 서언왕은 인(仁)과 의(義)를 행하였으므로 56개 나라가 굴복하여 왔다.

여임금

-주의 정치가 무도하므로 회이(淮夷)가 침공해 왔다.

유임금

-음란하여 사이(四夷)가 침입해 왔다.

제환공

-사이(四夷)가 산동성의 낭야로 올라가 여러 하(夏)를 무찌르고 또 여러 작은 나라를 멸망시켰다.

-재상 관중(管中)은 래이(萊夷) 사람이다.

 

-기주와 양주에 도이(島夷), 서주에 회이(淮夷)와 서이(徐夷), 제에게 멸망당한 개이, 노(魯)에게 멸망당한 도근이 있었다.

진(秦)

진시황

-6국을 정복해 통일한 뒤에는 회이, 서이가 모두 흩어져 일반백성이 되었다.

 

 

숙신(肅愼)

 

숙신족(肅愼族)은 한나라 이전의 전기숙신과 한나라 이후의 후기숙신으로 구분된다. 전기숙신은 중원 북계 및 남만주지역의 주민들을 말하는데 그 분포지역이 부여,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과 대부분 겹치면서 조선과 숙신이 함께 나오는 기록이 없기 대문에 숙신이 조선이 되었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요서지방의 하가점문화(夏家店文化)나 길림지방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가 전기숙신의 문화로 본다.'

 

후기 숙신은 시대에 따라 그 명칭을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만주족(滿洲族)으로 불리며, 읍루는 부여(夫餘)에, 말갈은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에 복속되었고, 발해 멸망 이후 여진족은 금(金)나라를 세워 북중국을 쳐들어갔으며, 후금(後金)을 세워 중원을 차지하여 청(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신족의 후신인 만주족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만주지역 일대에 살고 있지만 한족에 동화되어 역사와 언어마저도 잃어버렸다. '

 

그들이 지은「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라는 책에는 숙신 →읍루 →말갈 →발해 →여진 →만주족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는 제외하는 반면 발해를 포함시키고 있다.

 

현재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일부 남한의 학자들이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만주의 귀속권을 둘러 싼 국가이익 때문이다.

 

일제는 만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만주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분리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고, 중국은 현재 만주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를 당나라에 귀속된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의 실학자 한치윤은 "김부식이「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말갈, 여진족, 만주족이 우리겨레의 한 갈래였음을 망각하게 되어 만주의 역사를 잃게 되었다."고 하였다.

 

종합하면 전기 숙신은 고조선의 한 종족이었고, 후기 숙신의 읍루, 물길, 말갈은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는 약 1천년간을 우리 민족의 일부로서 같은 정치권을 형성했으나 발해 멸망 이후 고려와 조선의 정치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틈에 고구려, 발해 국민의 조선족과 함께 만주족이 되어 다른 정치권을 형성한 우리 겨레의 한 가지인 것이다.

 

 

동호(東胡)

 

동호(東胡)는 중국 전한(前漢) 때 북쪽 흉노족의 동쪽에 살다가 흉노에게 멸망하여 선비(鮮卑)와 오환(오환)으로 갈라진 족속이다.

 

흉노족(匈奴族)은 한고조(漢高祖)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한무제(漢武帝) 이전까지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을 만큼 강국이었는데 동호족은 한때 이 흉노에게 천리마, 왕 선우의 부인 알씨 그리고 영토의 할애를 요구할 정도로 강국인 때도 있었다.

 

흉노가 한무제에게 패하여 달아난 후 대흥안령에서 남하한 동호의 한 갈래인 선비가 흉노를 대신하여 중국 북쪽을 석권하였다. 선비의 단석괴가 죽은 후에 선비는 모용, 탁발, 우문, 독발, 걸복, 단, 토욕혼, 거란, 해 등으로 갈라져 북중국을 차지하여 중국의 오호16국과 남북조, 남송시대에 중국을 위협하였다.

 

동호는 서요하 상류지역에 살던 족속으로 고구려의 전신인 고리국(藁離國)을 세운 주체로서 부여, 고구려족의 원류인 맥족(貊族)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동호는 중국인화 하여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서요하부근의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에 나오는 비파형동검문화를 고조선과는 전혀 다른 중국의 소수민족인 동호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서북에는 흉노의 도의문화, 서남은 한족의 양날과 손잡이가 같이 붙어있는 칼문화, 동쪽은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가 있어 이들 세 문화가 뚜렷이 구분되며, 오히려 고조선의 문화가 서쪽으로는 하북성의 북경, 당산지역, 북쪽으로는 대능하 상류까지 영향을 미치며, 한무제 이전에는 한족이 결코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것이 사실로 입증되는 만큼 이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으로 우리 겨레의 터전이었음이 분명하다.

 

한족이 서요하 부근으로 진출한 것은 한무제의 위만조선(衛滿朝鮮) 정벌 이후이며 후일 고구려가 한나라에게 빼앗긴 이 지역에 대하여 '다물(多勿)'의 기치아래 다시 수복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요하 부근에 살던 동호는 한(漢族)족에 속하는 소수민족이 아니라 고조선을 형성했던 우리 겨레의 한 갈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 겨레의 기원을 예(濊), 맥(貊), 한(韓)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겨레의 갈레로 체계화되지 않은 막연한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중국사람들의 역사기록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우리겨레의 기원을 발해연안을 축으로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문화를 일구었던 이들 동이(東夷), 숙신(肅愼), 동호(東胡), 기타 여러 종족들로 보고, 이들이 우리겨레의 문화권을 형성한 주체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한국고대사연구소 오순제 소장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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