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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봉황(鳳凰)과 중국 용(龍)의 역사전쟁!

by 바로요거 2009. 11. 12.

한국 봉황(鳳凰)과 중국 용(龍)의 역사전쟁!


      - 동이족 봉황(鳳凰) 문화와 한족 용(龍) 문화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은 봉황(鳳凰)과 (龍)을 둘 다 신성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봉황(鳳凰)을 더 신성시하였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민족은 지도자의 상징으로 봉황(鳳凰)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우리민족의 상징은 호랑이나 곰이 아니라, 봉황(鳳凰)인 것이다. 동이족(東夷族)의 신수(神獸)는 봉황(鳳凰)이며, 한족(漢族)의 신수(神獸)는 용(龍)이다. 봉황(鳳凰)은 불(火)과 대륙 문화를 상징하고, 용(龍)은 물(水)과 농경 문화를 상징한다. 중국 한족은 황하강 유역에서 물(水)을 중심으로 출발하였고, 동이족(東夷族)인 배달(倍達) 민족은 북만주와 요동에서 시작하여 대륙에서 말 타고 활을 쏘는 문화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언어가 ‘빨리 빨리’인데, 이는 곧 말(火를 상징)을 타고 다니는 대륙기질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언어가 ‘만만디(천천히)’인데, 이는 물(水)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상징은 주로 불(火)을 상징하는 봉황(鳳凰)이며, 중국의 상징은 주로 물(水)을 상징하는 용(龍)인 것이다.


 봉황(鳳凰)은 용(龍)보다 지위가 한 단계 높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하늘을 받들었기 때문에, 하늘과 우리를 이어주는 새, 봉황. 삼족오(세발 까마귀)를 숭상했다. 그 증거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태양속에 있는 세발 까마귀인 삼족오나 몇십년 전까지 쉽게 볼 수 있었던 마을 입구 마다의 영역표시인 장승솟대 등이 있다. 솟대의 새 모양은 봉황. 삼족오(세발 까마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난다면 봉황(鳳凰)이 날지 용(龍)이 하늘을 날지는 않는다. 용은 승천의 꿈을 꾸지만, 봉황은 실제로 하늘을 날며 세상을 본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꼭대기의 새가 봉황 또는 천계(天鷄) 라는 사실이 우리나라가 봉황을 신성시 여겼음을 입증해 준다. 1999년 청와대에서 나라의 도장으로 제작한 국새(國璽)의 손잡이에 조형된 봉황은 백제 금동대향로에 있는 봉황을 모델로 제작했었다. 조선시대 경복궁 천정에도 봉황무늬가 있고, 현재 청와대 건축물에도 대통령을 상징하기 위해서 봉황무늬가 있다. 봉황은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 많이 남아있는 고구려 벽화에 사신도에도 봉황인 주작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금관에도 봉황이 들어가 있다. 통일신라 왕실도 용 보다는 주작(닭, 봉황)을 더 많이 선호했다.


서양에서도 봉황은 매우 높은 대접을 받고 있다. '불사조'의 의미로 로마제국 황제의 휘장이 봉황이었다. 중국에서도 천자(天子)의 궁문(宮門)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 ·봉문(鳳門)이라 하였고, 천자의 수레에 장식하여 봉거(鳳車) ·봉련(鳳輦) ·봉여(鳳輿)라고 하였다. 천자의 도읍인 장안(長安)을 봉성(鳳城), 궁중의 연못을 봉지(鳳池)라 하여 천자를 미화하는 상서로운 상징으로 여겼으며, 나아가서는 모든 경사스러운 일에 봉자(鳳字)를 썼다. 원래 용은 가장 높은 신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보좌하는 자리를 뜻한다.


 봉황(鳳凰)과 용(龍)은 둘 다 우리 민족의 배달국(倍達國, BCE 3,898~2,333)에서 상서롭게 여기던 동물의 상징이다. 그런데, 용(龍)에는 암수 구별이 없지만, 봉황의 경우는 암수 구별이 있다. 봉(鳳)은 수놈이고, 황(凰)은 암놈이다. 봉황이라고 하면 수놈과 암놈을 모두 싸잡아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봉황의 새끼를 봉추(鳳雛)라고 한다. 봉황(鳳凰)은 주로 오동나무에 서식하며, 특히 대나무 열매를 좋아하며 깨끗한 샘물을 마시고 산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민간인들은 ‘봉황’이 ‘동방군자의 나라, 배달(倍達)에서 나왔으며, 사해(四海) 밖까지 난다’ 고 하여 신성시하였다. 그리고,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의 한족(漢族)은 동이족(東夷族)의 상징인 봉황(鳳凰)을 깎아내리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족(漢族)의 용(龍)을 황제의 상징이라 칭하였고, 동이족(東夷族)의 봉황을 제후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봉황은 지상과 천상을 잇는 신조(神鳥)로서 배달민족의 숭배 대상이었기에 중국의 한족(漢族)은 한편으로 경배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 한족(漢族)의 용(龍) 보다 아랫 단계로 취급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봉황을 용(龍) 보다 아랫 단계로 취급했던 것은 그들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중국의 (龍) 문화도 알고 보면, 우리 민족의 배달국(倍達國, BCE 3,898~2,333)에서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BCE 2,692~2,593)에게로 전파된 것에 불과한 것을 알면 그것은 우수운 일에 불과하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은 (龍)도 신성시 여겼지만, 용(龍) 보다 봉황(鳳凰)을 더 신성시 여겼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체로 봉황(鳳凰)을 더 중요시 했다. 봉황(鳳凰)에서의 (鳳)은 '새 중의 새'를 뜻하며, (凰)은 '배달국의 임금(皇) 새'를 뜻한다. 중국에 황제가 나타난 것은 '진시황(秦始皇)' 때 부터이다. '진시황'의 '시황(始皇)'은 처음으로 황제가 나왔다는 얘기이다. 진시황 이전에는 배달민족의 나라, 즉 배달국, 고조선의 임금이 황제였고, 그래서 황(皇)자는 '배달나라의 왕'을 뜻하는 '白王' 을 쓴 것이다. 중국의 옛날 역사책에는 배달민족은 백민(白民)으로 나온다. 밝달(밝은 땅), 박달, 백달, 배달의 변천을 통해 배달(倍達)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봉황(鳳凰)'은 '새 중의 새, 배달나라 임금(皇)의 새'를 뜻하는 일이고, 지금도 대한민국(大韓民國) 청와대의 상징문양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봉황(鳳凰)은 왜 태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는가? 예문류취(藝文類聚)에는 “은 양(陽)을 상징하는 남방의 동물이다. 화양(火陽)은 만물을 동하게 하여 불꽃이 솟는다. 그러므로, 해가 뜨면 닭이 우니 자연히 날이 밝아 온다.”라고 하였고, 현중기(玄中記)에도 “동남쪽에 도도산(桃都山)이 있고, 위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도도(桃都)라고 부르며, 나뭇가지가 삼천 리에 걸쳐 뻗어 있다. 위에는 하늘을 나는 천계(天鷄)가 있어, 해가 처음 떠서 이 나무를 비추면 그 새가 운다. 그 새가 울면, 천하에 모든 닭들이 따라서 운다.” 라고 하였다.


고구려 벽화에 보면, 삼족오(三足烏, 일명 태양새)가 나오는데, 태양 속에 들어있는 세발가진 까마귀이다. 세발 까마귀는 원래 동이족이 숭상하던 신성한 새였다. 고대의 배달민족은 세 발 달린 까마귀태양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태양신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단군의 지팡이 꼭대기에 까마귀를 조각함으로써 단군이 태양신의 사자임을 나타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삼족오(三足烏), 그리고 정월 대보름의 까마귀제 등에서 신조(神鳥)로서의 까마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동네 입구의 솟대가 남아 있는데, 자세히 보면 세 마리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는 예언을 하는 새였다. 삼국시대 책이나 이야기들에서 보면, 까마귀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삼족오(三足烏, 일명 태양새)는 유일하게 남은 ‘태양 삼신(三神)’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이 ‘태양 삼신(三神)’에 대해서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고조선의 국교는 삼신교(三神敎) 즉 신교(神敎)였다.”라고 하면서, 삼신(三神)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에게 삼신(三神)은 생명을 주고 가호(家護)하는 신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삼신(三神)에게 제사하는 의식과 관습이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족오는 ‘태양 삼신(三神)’이며, 곧 환국(桓國)의 환인(桓仁),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을 지칭한다.


 원래, 중국의 용(龍) 문화는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의 홍산 문화에서 수입해 갔다. 배달국(倍達國)은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로 나누는데, 신시(神市)배달은 제1대 거발한 천황(즉위BCE3898)으로부터 시작되고, 청구(靑丘)배달은 제14대 치우천황(즉위 BCE2707)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신시(神市) 배달국의 홍산(紅山)문화 유적지인 내몽골 삼성타랍 지구에서 1971년 옥룡(玉龍)이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발견된 옥룡(玉龍)은 5,000년 전의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용(龍) 문화가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에서 시발했고,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왜냐면, 중국의 용(龍) 문화는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인 황제 헌원(BCE 2,692~2,593)에게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황제 헌원(軒轅)은 청구(靑邱) 배달국(倍達國)의 치우천황(蚩尤天皇)으로부터 변방의 자치정부의 황제로 임명받았는데, 배달국의 천황(蚩尤天皇)으로부터 독립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치우(蚩尤) 천황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10년간 73회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결국 배달국 치우 천황이 승리했고, 고대 동방에서 벌어진 최대 전쟁이었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5년간 72회 전쟁을 치룬 것보다 규모가 컸던 전쟁이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모습은 치우천황의 상징인데, 모습은 도깨비의 상(像)이다. 치우(蚩尤) 천황의 모습이 도깨비의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동이족(東夷族)을 비하(卑下)하여 동이족인 치우(蚩尤) 천황을 도깨비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우(蚩尤) 천황의 상징은 한옥 지붕의 양쪽에 있는 귀면와(鬼面瓦)에서도 볼 수 있었고, 장승에서도 볼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용(龍) 문화는 황제 헌원 때부터 숭상되기 시작하였고, 황제 헌원 때부터 용(龍)의 문화가 중국의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중국의 청동기 문화의 출발도 역시 동방 배달국(倍達國)의 청동기 문화가 전파된 것이라고 한다. ‘신시 배달국(BCE 3,898~2,707)’에서 ‘청구 배달국(BCE 2,707~2,333)’ 시대를 창도한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치우 천황(蚩尤, BCE 2,707년 즉위)은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의 투구를 하여 만주 일대를 석권하였다고 한다. 청구 배달국의 문화를 일명 용산(龍山) 문화라고 하는데, 청구 배달국의 용산(龍山) 문화도 또한 나중에 중국의 문화가 출발하는 모태가 된다. 중국의 하(夏, BCE 2,205~1,766), 은(殷, BCE 1,600~1,046), 주(周, BCE 1,046~771)나라의 문명은 알고 보면, 동방의 배달국(BCE 3,898~2,333)과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한다.

치우(蚩尤) 천황은 B.C 2,700년에 백두산 아래 신시(神市)에서 요녕성의 요하강 서쪽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긴 후, 황제 헌원(軒轅)과의 결전을 치루었으며, 산동반도의 태산(泰山) 아래와 황하강 유역에 배달국의 청동기 문화를 보급하였다. 용산 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곳은 산동성 제남시(齊南市)의 동쪽에 있는 용산(龍山)지역이기 때문에 ‘용산(龍山)문화’ 라고 한다. 용산(龍山)은 현재 산동반도의 태산(泰山)아래를 가리킨다. 청구(靑丘) 배달국의 용산 문화 유적지는 요녕성. 산동성. 하남성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지역에서도 종종 발견되고 있다. 청구(靑丘) 배달국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동기(靑銅器) 문화의 시작이다. 치우(蚩尤) 천황이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돌입하였음을 나타낸다. 용산(龍山)문화 유적지에서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 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 등의 다양한 청동(靑銅) 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난 후부터는 청구(靑丘) 배달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의 하(夏)나라 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시대의 용산(龍山)문화가 동북 아시아에서 최초의 청동기 문화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청구(靑丘) 배달국의 용산(龍山)문화는 중국으로 전해져 하(夏, B.C2,205~1,766)나라의 청동기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중국의 한족(漢族)은 자기네들이 용(龍)의 계승자(傳人)라고 하며,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한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용(龍)의 후손이라고 부른다. 중국에는 용(龍)을 새긴 벽, 용 조각의 지붕, 금실로 수놓은 용, 용 모양의 배, 용 도안, 용을 그려 넣은 티셔츠, 용을 상호로 하는 각종 회사들이 수두룩하다. 용춤(龍舞)은 한족(漢族) 및 중국 소수 민족들의 민간에서 행해지던 춤이며, 용춤(龍舞)을 통하여 용(龍)이 중국인 한족의 초강력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용(龍)뱀 토템사상을 숭배했던 한족(漢族)이 기타 동물을 숭상하는 족속들을 전쟁을 통해 합병하여 대규모의 국가로 탄생하면서 신성시된 동물의 상징이다. 원래, 중국의 한족(漢族)은 뱀을 신성시하였다. 뱀 토템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일찍 광범위하게 숭배했던 사상이었다. 뱀 토템 사상이 황제 헌원(軒轅)의 시대에 이르러 청구(靑邱) 배달국(倍達國)의 용(龍) 문화를 수입하여 일반화 되었고, 그로부터 중국 한족(漢族)은 용(龍)을 신성시 하였던 것이다. 용(龍)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부르는 신물(神物)이요, 황하(黃河) 속에서 꿈틀대던 수신(水神)으로 중국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중국 황하강(黃河江)의 사진을 보면, 구불구불 굽이치는 황룡 한 마리를 보는 듯 하다. 황하(黃河)는 중국 한족(漢族)에게는 어머니의 강이요 민족의 젖줄이었으며, 그런 영향으로 중국인들은 더욱 용(龍)을 신성시하였다. 동이족을 상징하는 영물은 봉황(鳳凰)이었고, 황하족을 상징하는 영물은 용(龍)이었다.


 중국의 신화와 전설 가운데 중화민족 창조와 관련하여 가장 보편적인 신화는 여신 여와(女媧)과 남신 복희(伏羲)의 이야기이다. 혼자 지내기에 심심했던 여신 여와(女媧)가 황하의 황토 진흙으로 인형처럼 사람을 빚어내었는데, 땅에 내려놓자마자 살아 움직이며 그녀 주위에서 즐겁게 뛰어 놀았다. 여와는 너무 기뻐 매일 쉬지 않고 사람을 빚었는데, 하루는 너무 지쳐 묘책을 궁리하다가 넝쿨을 잘라 진흙탕에 담가 두었다가 휘두르니, 넝쿨에서 떨어진 진흙 방울방울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천지간에 사람이 가득 차게 되었다. 여신 여와(女媧)는 나중에 사람들을 위해 나쁜 괴물도 물리쳐 주고, 결혼제도를 만들어 남자와 여자가 후손을 생산하도록 돕기도 하였는데, 그 모습은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한 여신이었다. 얼마 후, 여신 여와(女媧)에게 배우자가 생기는데, 그가 바로 남신 복희(伏羲)이다. 복희는 인류에게 사냥을 가르치고 팔괘와 문자와 음악 등 중국문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고, 중국에서 국가적으로 숭배하는 중요한 신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복희 역시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대로 전해내려 온 여와(女媧)와 복희(伏羲)의 그림은 서로 뱀꼬리를 휘감고 있는 남녀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중국 한족(漢族)이 오래 전부터 뱀 토템 사상을 숭상하여 왔음을 알 수 있으며, 뱀꼬리를 휘감고 서로 꼬여 있는 모습은 남녀의 결혼을 상징한다. 참고로, 태호(太昊) 복희(伏羲)는 인류 최초로 혼인제도를 제정하여 인륜의 푯대를 세우신 분이며, 문자를 제정하였고, 역(易) 철학을 창시하였으며,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로서 인류 문명을 처음 개창하신 분이다.

중국의 신화나 설화 속의 신(神)과 영웅은 대개 이처럼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우주가 혼돈 덩어리였을 때 자신의 몸을 바쳐 하늘과 땅을 분리시키고 천지를 창조했던 반고(盤古)가 그렇고, 수신(水神)으로서 신들의 전쟁에 참여했던 공공(共工)과 그의 신하들이 그렇다. 중국신화의 보물창고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사람과 동물을 합성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특히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한 신(神)들이다.


 서구인들뱀과 용(龍)을 주로 악마나 사악한 존재로 인식하여 왔다. 아담(Adam)을 꼬여 낸을 공격적이고 위험한 동물로 상징화시켰고,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시켰다. 헤라클레스(Herakles)와 같은 고전 영웅들의 신화는 용을 물리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구하는 왕자도 또한 먼저 용과 싸워 이겨야 한다. 중국의 뱀과 용(龍)이 수신(水神)으로서 존귀함의 상징이었음에 반해, 서구의 뱀과 용(龍)은 입에서 불을 뿜는 악마의 상징이었다.


 한편, 우리 민족을 일컬어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부른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동이족(東夷族)은 동방의 큰 활을 잘 쏘는 어진 민족이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양궁(洋弓)에서 석권하는 이유가 그래서인지 모른다. 동이족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활을 잘 다루어야 했다.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과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기마술과 궁술의 달인이었다. 무릇 동이족(東夷族)은 중국 문화의 뿌리요, 문명을 전해준 스승이었다. 인류문명의 뿌리와 중국 한족(漢族) 문화의 뿌리가 모두 동방 배달국과 고조선에서 전해진 고대 신교(神敎)문화에서 비롯되었다.


 ‘개벽실제상황’ 책의 183 페이지를 보면,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夏).은(殷).주(周)의 건국(建國) 시조(始祖)는 전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夏).은(殷).주(周)의 건국 시조는 100% 배달 혈통인 것이다. 하(夏).은(殷).주(周) 때까지는 중국에 한족(漢族)의 존재가 없었고, 하(夏).은(殷).주(周)의 시대가 지나고,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족이 북상하면서 한족(漢族)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秦)나라의 진시황이 중국의 남부 지방을 통일하고, 한(漢)나라의 유방이 드디어 중국을 완전 통일하면서 중국의 한족(漢族)이 형성되었다. 중국의 역사는 춘추 전국시대부터 시작되고, 한족(漢族)의 역사는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된다. 춘추 전국시대 이전의 하(夏).은(殷).주(周)의 시대는 배달민족이 나라를 건국하였으므로 배달 민족인 한국의 역사인 것이다. 한(漢)나라 무제 때의 사관이었던 사마천(司馬遷)은 황제헌원 이전의 유명한 인물이 모두 동이족(東夷族)인 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지은 사기(史記)라는 역사 책에서는 황제헌원(黃帝軒轅)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였다.  


봉황(鳳凰)과 용(龍)과 관련해서 복룡봉추(伏龍鳳雛)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엎드려 있는 용과 봉황의 새끼라는 뜻이다. 초야에 숨어 있는 훌륭한 인재를 말하며, 제갈공명(諸葛公明, 181~234)과 같은 인물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제갈공명(諸葛公明)이 배달민족인 동이족(東夷族)이었다는 사실이다. 제갈공명(諸葛公明)은 원래 산둥반도 랑야국(琅야國) 양도(陽都)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지만,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의 집에서 자라면서 숙부가 원술에 의해 예장(豫章) 태수로 임명되자, 숙부를 따라 남쪽으로 왔었다. 제갈공명은 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역사적 인물이고, 도교(道敎)에서는 관우와 함께 신(神)으로 추앙되고 있다. 제갈공명의 제갈(諸葛)은 본디 갈(葛)씨가 본성(本性)이고, 지금의 산둥 반도인 랑야국(琅야國)의 제현(諸縣)이란 곳에서 살다가 나중에 양도(陽都)로 옮겨 살았으며, 제현(諸縣)에서 온 갈(葛)씨라는 뜻으로 제갈(諸葛)씨가 되었다. 따라서, 제갈공명은 산둥 반도에 살았던 동이족(東夷族)이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산둥반도는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곳이다.


 한편, 동이족(東夷族)인 강태공은 나중에 (齊)나라의 왕이 된 후에도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의 문화를 중국의 한족(漢族)에게 전수해 주었고,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와 삼신관(三神觀)을 중국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중국 (齊)나라에서는 팔신제(八神祭) 풍습이 있었는데, 팔신제(八神祭)는 8신(八神)에게 제사지내는 제천 의식이다. 여기서, 8신(八神)은 삼신(三神.조화신.교화신.치화신), 치우(蚩尤)천황(天皇), 천지일월(天地日月.하늘.땅.해.달)을 말하고, 치우천황은 배달국(倍達國)의 도읍지를 청구(靑丘)로 옮기고, 동방 최초로 청동기 국가 문명을 내놓은 치우 천황(蚩尤, BCE 2,707년 즉위)을 말한다. 그 후, 900년간 중국은 배달국(倍達國)의 신교(神敎) 문화와 배달국(倍達國) 치우 천황(蚩尤, BCE 2,707년 즉위)을 하느님처럼 받들어 모셨다.


 요즘,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2002년 02월부터 추진하고 향후 5년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의 동북쪽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동북지역,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의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것에 있다. 중국은 이러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하여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고, 과거의 역사적 은혜를 저버리고 있다. 중국은 과거에 한반도를 침략하고자 시도했다가 번번이 패망했던 맞이한 뼈아픈 역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중국은 배사율(背師律)을 범하면, 냉엄한 역사적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지난날, 중국의 역사는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한반도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했을 때, 중국 왕조의 멸망 또는 붕괴를 초래한 수많은 사례를 간직하고 있음을 중국은 현재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다가 살수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대패하여 패망의 길을 걸었고, 당나라 태종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안시성에서 고구려 양만춘에게 대패하여 막대한 국력 손실을 입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 원군으로 왔다가 조선에 대한 극심한 수탈과 착취를 하였고, 7년 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되었으며, 여진족에게 왕조를 빼앗기는 운명을 맞았다. 청나라는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일본보다 먼저 조선을 장악할 욕심에 조선 파병을 결정하지만,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여 청나라 왕조가 붕괴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중공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개입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의 피해를 입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龍)문화의 뿌리가 청구(靑邱) 배달국(倍達國)의 동이족(東夷族)이었으며, 중국의 고대국가였던 (夏, B.C2,205~1,766), (殷, B.C1,600~1,046), (周, B.C1,046~771)의 문화의 뿌리가 사실 알고 보면 동방 배달민족의 배달국(BCE 3,898~2,333)과 고조선(古朝鮮, BCE 2,333~238)에서 기원했음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중국인들은 배달민족 국가인 우리 한국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데, 요즘, 그들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파렴치한 역사적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한국의 봉황(鳳凰)과 중국의 용(龍)의 싸움이 바로 동북아 역사 전쟁의 실체라 할 수 있는데,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역사 왜곡 사업을 통하여 자신들의 스승을 배반하는 배사율(背師律)을 범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이 과거에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들의 스승이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지금 그들은 역사적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계속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적 만행을 지속화 한다면, 배사율(背師律)의 냉엄한 역사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1. 증산도 사상연구소, 김선주 연구원의 鳳이야기

2. 책 “개벽 실제상황”, 대원출판.

3. 증산도(甑山道)의 도전(道典).

4. 만화 환단고기, 제 2권.

5. 경희대학교 김종미의  “중국 한족은 뱀의 자손이다.” 

6. 김하중, 『떠오르는 용 중국』, 비전과 리더십

7. 조조삼국지 3 ‘불꽃 튀는 천하’, 리더스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