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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 神敎文化

한민족의 고유신앙 신교(神敎)와 유. 불. 선

by 바로요거 2009. 7. 14.

한민족의 고유신앙 신교(神敎)와 유. 불. 선

 

우리민족의 근본정신 신교(神敎)

 

   여러분들은 유불선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았어도, 신교를 들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놀랍게도 신교는 우리민족 7천년동안의 국교였습니다. 외래종교가 이땅에 들어오기 전 우리역사를 이루었던 정신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근본정신인 이 신교에 대한 가르침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 신교라는 말을 썼는가 하면, 이신설교(以神說敎) 때문에 신교라고 얘기합니다. 신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신교에서 말하는 신(神)이란 무엇인가?

 

첫째, 우주의 절대자를 지칭하는데 그 분을 상제(上帝)라고 호칭해 왔습니다.


  우리민족은 독특해서 그냥 상제라고 하지 않고 접두사를 붙여서 삼신상제(三神上帝)라고 합니다. 이 천제가 과연 막연한 하늘에 대한 제사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였습니다. 인간과 모든 만물을 지배하는 상제께 천제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무생물에도 존재하는 일반적인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옛부터 우리민족은 무생물에도 신이 내재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신을 섬기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문화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나가기 전에 용왕(龍王) 또는 용신(龍神), 수신(水神)에게 풍어제를 지내거나, 산에 나무를 하러 들어가면 산신제를 지내고, 묘자리 하나를 파도 산신제를 지내는 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애니미즘입니다.

신교문화는 한마디로 신과의 교감과 제사문화라는 것입니다.

 

신교: 선도(仙道)의 맥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민족에게 있어 우주의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바로 신교입니다. 그러니까 7500년동안 우리민족의 국교로서 자리잡아왔던 근본적인 가르침이 신교입니다.

  신교의 기원은 환인천제부터였는데, 7대동안의 역년이 3301년이니까 평균잡아서 500살 정도로 장생불사를 했습니다. 신교의 매우 중요한 특성 중 하나가 장생불사(長生不死)인데, 그 맥이 소설 '단'에 나오는 그런 신선의 맥, 선도(仙道)의 맥으로서 신교의 맥입니다. 노자 장자의 맥이 아니라 그것은 신교의 맥입니다. 신교와 본래 신선도는 결국 한 뿌리인 것입니다.

 

   초대 환인천제께서 천산(天山)에 내려와 장생불사하면서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냈습니다. 그 때는 제정일치(祭政一治) 시대로서 환인 자신이 정치적인 군장이면서 성직자의 역할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는 전 백성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아 통치를 했는데, 그 구심점이 바로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드리는 천제(天祭)였습니다. 천제는 3월 16일과 10월 3일 두번에 걸쳐서 지냈습니다.

 

근근히 유지해 온 신교의 맥

  그러면 이 신교의 맥이 언제부터 끊어졌는가, 대진국이 망하면서 끊어졌습니다. 고려의 복원관과 조선의 소격서에서 태을제(太乙祭)를 지내 왔으나, 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초기에는 그 전통이 조금 살아있다가 유교사회가 본궤도로 진입하면서 그 위상이 격하되다가 기어코 사대주의 사상에 영혼을 팔아버린 유생들과 그 선봉인 조광조에 의해 삼신상제님과 천지신명에게 제사 올리던 제기(祭器)와 신위(神位)까지 모조리 파묻혀 버리고 소격서가 폐지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 이래 수 천년동안 지속되어온 신교 신앙의 자취는 여전히 민중의 삶 속에 뿌리 깊이 남아있었습니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하여도 어촌에서는 풍어제(豊漁祭)를 지냈으며 마을에서는 성황당(城隍堂)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세계화의 거센 바람 속에 농경사회가 몰락하고, 도시화가 급진전되며, 서양 과학 물질문명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제 신교 신앙의 자취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상제>라는 어휘는 아주 이질적인 언어가 되었고,

각종 신명을 모시던 공동체의 제사의식은 철저히 미신시 되면서 사라진 것입니다.

다만 돌아가신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의식만이 근근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신교가 유불선(儒佛仙)의 뿌리

 

 신교는 7500년동안 우리민족의 국교였고 지금까지도 면면히 흘러 내려오고 있는데, 그 맥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유 불 선의 모체가 된다는 사실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있습니다. 난랑이라는 화랑에게 지은 글인데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중에서>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 불 선 삼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교지와 같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당시 그것을 사구라고 했기 때문에 노사구는 공자를 얘기하는 겁니다. 공자가 우리 신교의 사상 중에서 입즉효어가하고 출측충어국하는 사상을 자기의 종지로 삼았습니다.

  주나라에 주사라는 벼슬이 있었습니다. 주사는 도서관 직원을 가리킵니다. 노자가 주나라에서 도서관 직원을 했어요. 그래서 주주사는 노자를 얘기하는 겁니다. 노자도 역시 신교의 사상 중에서 하나를 절췌해서 자기의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석가모니 역시 우리 신교사상에서 하나를 가져가 자기의 종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본래 풍류도인 신교가 있어서 유 불 선의 사상이 종합된 민족의 국교가 있었다는 사실은,

유 불 선 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을 종합한 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유교에 관하여  

 

 유교에 대해서 먼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기술을 한 것이지 창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공자는 누구의 사상을 기술했느냐, 중용 30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 즉 중니(공자)는 요순의 가르침을 기술했으며 문무의 도를 법으로 삼아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자가 요순의 도를 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요임금은 황제헌원의 고손자로서, 황제헌원이 현효를 낳고 현효가 제곡고신을 낳습니다. 이 제곡고신의 아들이 바로 요임금입니다.

황제헌원은 사기 13권을 보면, '黃帝生於白民 自屬東夷'라 해서 동방의 백민에서 출생을 했다고 되어있습니다. 환단고기에 보면, 황제헌원은 배달국 8대 안부련 환웅 때 이복형인 신농씨와 함께 동이족에서 분파해 오늘날 중화족의 정신적 시조가 됩니다.

  순임금인 경우 맹자가 말하기를 '舜生於諸風 遊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즉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 부하에서 살다 명조에서 죽었으니 동이인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나오는 지명인 제풍, 부하, 명조는 모두 동이족의 땅이었습니다.

  참고로, 요임금과 순임금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서경에 '동순망질 사근동후 東巡望秩 肆覲東后'라 해서, 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산천에 제사지내고 '동방의 임금을 뵈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근동후 肆覲東后'에서 근(覲)은 {강희자전}에 하현상(下見上),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뵙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후(東后)는 단군왕검을 말합니다. 즉 고조선의 제후 순은 동방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찾아뵈었다는 뜻입니다.

   공자 자신도 사실은 동이족입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을 보면, "나(공자)는 은(殷)나라 사람이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지역의 산동성 일대에서 살던, 흰옷을 입고 백색을 숭상한 은족(殷族)이 전형적인 동방조선족 계열의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중국학자 서량지나 임혜상이 인정한다는 것을 아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처럼 유교의 뿌리는 따지고 보면 전부 우리나라입니다.

결국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 스스로가 말하듯, 요순의 가르침을 기술하는데 불과하다 했는데,

요.순 임금은 역사상 동이족(한민족)이었으며, 공자 또한 동이족이었습니다.

즉 유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신교에서 뻗어나간 한 갈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 관하여  

 

 다음은 불교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만든 불교를 최초의 불교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초대 구류손 부처, 2대 구나함모니 부처, 3대 가섭 부처가 있었습니다. 석가 부처는 네번째 부처입니다.

  그런데 이 전불(前佛)시대의 유적이 우리나라에 굉장히 많습니다. <삼국유사:아도기라(阿道基羅)>를 보면, 고구려의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이 그의 아들 아도를 신라에 보내면서 말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곳 고구려는 불법을 알지 못하나, 그 나라(신라)의 경도(京都) 안에는 절터 일곱 처가 있으니, 이는 모두 전불시(前佛時)의 절터니라"인데, 여기서 일곱 처는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黃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 담엄사(曇嚴寺)를 가리킵니다.

 또 고려 충숙왕 15년에 인도의 108대 조사(祖師)인 지공선사(指空禪師)가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에 와서 그 절터를 둘러보고 말하기를, "상세7불(上世七佛) 시절의 대가람(大伽藍) 터이다"라고 얘기를 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 더 든다면 화엄경에 바다 건너의 동방나라가 불교의 종주국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화엄경>

"해중(海中)에 금강산(金剛山)이 있는데 옛적부터 모든 보살들이 그 산 중에 살고 있다. 현재도 법기(法起)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서 상주하며 불법을 강설하고 있다."

법기는 중국 동진(東晉)시대(317-419) 사람으로서 '옛적부터'는 동진시대 이전, 즉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372) 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위의 예들은 석가불 이전의 전불교가 우리나라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도교에 관하여

 

 도교에 대해서도 말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국도교는 황노교(黃老敎)라고 합니다. 황제는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 혈통이 우리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갔습니다. 갈홍(葛弘) {포박자(抱朴子)}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포박자(抱朴子)>

昔有黃帝 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劾召萬神
황제가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아 만신을 부렸다 

 

 

 

 

부연하자면 일찍이 황제는 14대 자오지 천황(치우천황;서기전 2707-2599) 때, 배달국의 수도인 청구(靑邱: 오늘날의 요령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삼청궁(三淸宮)에 들러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선사(紫府仙師)를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음부경}이라 불리우는 {삼황내문}을 전수받습니다. 이것은 황제 학문의 맥 자체가 우리 동방에 뿌리를 두고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노자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계미(B.C. 518년)에 노인(魯人) 공구(孔丘)가 주(周)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禮)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의 성(姓)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며, 그 선조(先祖)는 풍인(風人)인데 서쪽으로 관문(關門)을 나가 내몽고를 경유하여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교화하였다.'

 

이것은 노자 역시 황제와 더불어 동이족이며, 노자의 성은 원래 한씨로서 李耳의 '李'는 '木의 子' 즉 東方의 子란 뜻입니다. 목은 오행으로 동방을 뜻합니다. 동방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름에서 말해주는 것입니다.이렇게 도교의 원뿌리도 우리나라 신교의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기독교에 관하여

 

 

  

기독교도 그 뿌리가 있습니다. 슈메르 연구학자인 S.N 크래머 교수가 자신의 저서인 '역사는 슈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에서 지적했듯이, 서양에 있어서 최고(最古)의 문명은 슈메르 문명입니다.

  사실 서양 역사가들에게 이 슈메르 문명은 최대의 의문사(疑問史)입니다. 슈메르 문명을 건설한 민족이 어디서 왔는가, 원래 원주민인가 아니면 아프리카에서 왔는가, 유럽에서 왔는가 인도에서 왔는가 등등. 지금은 동방에서 왔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습니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환국에는 12환국이 있었는데, 그 중 바이칼호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수밀이국(須密爾國, Sumer)과 우루국(虞婁國, Ur)이었습니다. 수밀이국과 우루국 사람들이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가서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슈메르 민족이 사용하던 설형문자는 태호복희씨가 사용했던 8괘와 흡사하며, 언어도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 기독교(유대교)문화의 뿌리되는 아브라함의 고향은 바로 슈메르 문명이 자리잡고 있던 갈대아 우르(Ur)입니다. 그가 아버지 데라를 따라 서기전 1950년경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의 줄기를 타고 북쪽으로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주하는 과정에서, '강을 넘어온 사람'의 뜻으로 헤브루인이라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또 유대족이 황인종, 그 중에서도 몽골인과 근접한 유전자를 가지고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독교의 모체 문명의 뿌리는 바로 우리 환국문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삼일신고(三一神誥), 천부경(天符經), 참전계경(參佺戒經)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일신고의 제2장을 보면 '신은 위 없는 첫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라 해서, 이것은 기독교의 신관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관에 영향을 준 슈메르의 종교신앙이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교에 뿌리를 두고있기 때문입니다.

초가잠빌의 지구라트, 에람, B.C.3000년경

   슈메르의 종교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산' 혹은 '하늘 언덕'이라 불린 지구랏(Ziggurat)이라는 제천단 유적들은, 신교의 삼신신앙과 제천문화가 여전히 환국의 후예인 슈메르인들의 삶과 신앙의식 속에서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슈메르의 지구랏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도 그 원뿌리를 신교에 두고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