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과 이율곡
신사임당과 이율곡은 모자지간이다.
신사임당은 이율곡의 어머니이며, 이율곡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신사임당은 5만원짜리 지폐에, 이율곡은 5천원짜리 지폐에 각각 등장을 한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1551년)은 조선 시대의 여류 문인이자 화가이다.
신사임당 생애
신사임당은 강원도 강릉 태생으로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본명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그의 손자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건국한다.-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1] 1522년 덕수 이씨의 이원수와 결혼하여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화가로서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숙종, 송시열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발문을 쓸 정도였다.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다. 별세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고, 현재 5만 원짜리 지폐의 초상으로 선정되었다.
역사 속의 신사임당
당대 여성으로서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자면 페미니스트로 인정받을 만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사임당은 높은 인격을 갖추었으면서 당대 여성의 굴레를 벗어나 예술적 재능을 꽃피웠으며, 교육가이자 학문가로도 후대에 이름을 남긴 종합적인 모범 부인이었다.[2] 가정교육 방식도 자녀들이 자신의 재능에 맞추어 공부하게 하는 자아실현형이었기에[3] 딸 매창과 아들 율곡을 그와 같이 잘 길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의 작품
주석
- ↑ 한겨레 21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2004년 2월 4일자
- ↑ 이은상(1962),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성문각.
- ↑ 신사임당, 그를 '현모양처'에 가두지 말라, 한겨레21
신사임당 | |
---|---|
출생 | 1504년 강원도 강릉 |
사망 | 1551년 |
국적 | 조선 |
별명 | 사임당, 임사재 |
직업 | 문인, 화가 |
배우자 | 이원수 덕수이씨 |
자녀 | 이선, 이번, 율곡 이이, 매창 |
부모 | 평산 신씨 / 용인 이씨 |
웹사이트 | http://www.sinsaimdang.or.kr/ |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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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조선 예술가) [申師任堂]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예술가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로 칭송된다. 본관은 평산.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이이는 〈행장기〉를 지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순효한 성품 등을 기록했다. 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당호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강릉 외가에서 자랐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혼인했다. 그뒤 친정에 머물다가 38세에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포도·묵죽·묵매·초충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렸다. 산수에서는 안견파 화풍과 강희안 이래의 절파 화풍을 절충한 화풍으로,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산수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월하고주도 月下孤舟圖〉에서 산들은 나지막하고 옆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수면을 따라 전개되는 공간은 막힘이 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작품의 구도나 공간처리 등은 안견파의 것을 확산시킨 듯하지만, 필묵법이나 준법은 절파 계통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초충도 草蟲圖〉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한 필치와 미려한 설채법을 구사했다. 8폭의 〈초충도〉 중에서 '가지'를 살펴보면, 화폭의 중앙에 곡선진 가지의 두 줄기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섬약한 줄기들에는 밤색과 흰색의 가지들이 곱게 열려 있다. 가지 주변에는 종류가 다른 화초와 곤충들이 배열되어 있어 그림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안정된 구도, 몰골법(沒骨法)으로만 이루어진 묘사, 아담하고 음영을 살린 설채법 등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보여준다. 이밖의 주요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노안도 蘆雁圖〉·〈연로도 蓮鷺圖〉·〈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 등이 있다. 사임당의 화풍은 넷째 아들인 우(瑀)와 맏딸인 매창(梅窓) 이부인(李夫人)에게 전해졌다. 글씨는 초서 6폭과 해서 1폭이 남아 있다. 1868년 강릉부사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했다.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과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가 유명하다.
출처: 브리태니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3s277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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