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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세 흐름 읽기/예언&비결*미래정보

남사고 선생과 정감록-남사고의 명예언

by 바로요거 2008. 12. 15.

32)남사고와 ‘정감록’ 

 

한번은 영조 임금이 대신들에게 “도대체 남사고가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살아생전 그는 미관말직에 종사한 하급관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후 200여년 뒤 조정에서 그 학식과 인품을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큰 인물이었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선조 초기 천문 교수로 발탁됐다. 보통 천문을 비롯한 잡학(雜學)의 교수는 중인 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남사고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천문지리가로 평가를 받았다.‘정감록’의 핵심개념인 이른바 십승지설(十勝地·최고의 피란지에 관한 주장)도 그 한 뿌리가 남사고에 닿아 있다. 남사고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지었다는 ‘남사고비결’이란 책이 18세기 이후 크게 유행했다. 구한말엔 ‘격암유록’이란 예언서도 추가로 발굴됐다.

 

 

 

▲ 경북 울진의 불영계곡에 자리잡은 불영사. 타고난 명예언가였던 남사고는 어린 시절 고향 가까이 있는 불영사를 자주 찾았다. 거기서 그는 한 고승을 만나 비결 3권을 받았다. 정감록의 핵심개념인 이른바 십승지설도 그 한 뿌리가 남사고에 닿아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남사고처럼 이름난 예언가는 역사에 드물다. 그런 비상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늘 곤궁했고 박복했다. 몸에 병이 많아 늘 죽음과 직면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고, 한겨울엔 몸에 걸칠 외출복이 없어 친구 집에 문상조차 못 갔다. 너무도 불우했던 남사고는 굽이굽이 용틀임하며 달려가는 산줄기를 그리워했고, 밤하늘 별자리를 바라보며 외로운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남사고와 불영사

남사고는 경북 울진 출신이다. 그는 어렸을 때 자주 불영사(不影寺)를 찾아갔다. 이 절은 산자수명하여 부처를 비춘다는 불영계곡 안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소년 남사고는 절간에서 한 노승을 만났는데 그는 소년이 남다른 인물이 될 줄로 짐작해 3권의 비결을 내주었다.

천편(天編)은 별자리의 운행과 그 운세 등 천문에 관한 모든 사항을 항목별로 적어 놓았다. 지편(地編)은 산천의 지세와 명당 등 풍수를 자세히 논한 것이었다. 마지막 인편(人編)은 한번만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 그 명운(命運)을 알아맞히는 방법을 기록한 비밀스러운 책이었다.

 

 

▲ 조선 11대왕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능묘가 있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남사고는 이곳에 능묘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했다.

노승은 이 책들을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다. 아무쪼록 덕을 쌓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뒤 어느 날 노승은 남사고의 공부를 점검하러 집으로 찾아갔다. 당연히 제1권인 천편부터 차례로 공부하고 있으리라 짐작했으나, 남사고는 인편에 실린 각종 비술에 빠진 나머지 천편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노승은 남사고가 비결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쓸까 염려한 나머지 남사고의 집에 불을 질러 책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불영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 불영사를 품고 있는 불영계곡

 

남사고의 지리 공부

졸지에 비결을 빼앗긴 남사고는 새 각오로 삼천리강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제야 지리 공부의 요체를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명당을 얻더라도 결국 덕을 많이 쌓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쳤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남사고가 아버지 무덤을 아홉 차례나 이장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는 지리를 완전히 터득한 고수였던 지라 가장 좋은 자리를 택해 아버지의 묘를 썼다. 그런데 써놓고 보면 더 좋은 자리가 문득 눈에 띄곤 해 옮겨 쓰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비룡승천(飛龍昇天·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양)형의 명당을 얻어 다시 이장을 하였다. 그때 지나가던 한 술사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구천십장(九遷十葬·아홉 번 묘를 옮겨 열번 장사를 지냄) 남사고야, 비룡승천을 좋아 마라. 고사괘수(枯蛇掛樹·말라 죽은 뱀을 나뭇가지에 걸친 모양)가 아닌가?”

남사고는 깜짝 놀라 산세를 다시 살폈다. 죽은 용이 분명했다. 그 술사를 만나 한 수 배우려 했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생각 끝에 남사고는 지각유주(地各有主)라, 명당도 저마다 임자가 따로 있어 인력으로 바꿀 도리가 없다는 깨침을 얻었다. 그는 별로 하자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묘 자리를 구해 아버지의 유해를 평안히 모셨다.

요컨대 사리사욕에 사로잡히면 눈이 멀어 명당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설사 요행히 명당을 차지하더라도 발복(發福·복이 나타남)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남사고의 실패를 약간 달리 해석한다. 조상이 지은 죄가 워낙 많아 남사고가 일껏 명당을 잡더라도 쓸모없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른바 구천통곡(九遷痛哭·아홉 번 옮기고 통곡함)을 통해 남사고는 덕을 쌓는 것이 최우선이란 고승의 가르침을 확인했다 한다. 앞의 이야기는 한낱 설화에 불과하지만 지관 남사고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남사고의 명예언

 

지리 공부를 마친 남사고는 서울에 놀러 갔다. 그는 권판서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과 두루 사귀었다. 그는 이미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에 서울 친구들에게 몇 가지 예언을 들려주었다.

 

첫째, 곧 조정에 당파가 생겨날 테니 조심하란 것이었다.

둘째, 왜적이 난리를 일으키는데 만일 용(辰) 해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으나 뱀(巳) 해에 전란이 시작되면 나라는 영영 망하고 만다.

셋째, 지금 사직동을 둘러보니 왕기(王氣)가 서려 있어 거기서 임금이 나올 것이다.

넷째, 태릉이 들어설 곳을 가리키며 장차 태산에 봉해진다고 하였다.

 

첫째 예언은 선조 8년(1575)부터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일어나 사실로 입증됐다.

둘째 예언 역시 용 해인 임진년(선조 25)에 왜적이 쳐들어와 꼭 맞아떨어졌다.

셋째도 사직동에 살던 선조가 뜻밖에 대통을 이어 1567년 등극함으로써 적중했고,

넷째는 명종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가 죽은 뒤 태릉에 묻혀 기정사실이 됐다.

 

이처럼 남사고의 예언 능력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번은 그가 하늘 별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더니 자미성(紫微星·어진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이 빛을 잃어버리는 참이었다. 아마 자기가 죽을 날이 다 된 모양이라며 남사고는 서울을 떠나 귀향길을 서둘렀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남명 조식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니 자미성은 회복세에 있었다. 그제야 남사고는 자미성의 변화가 남명의 죽음을 예고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수련을 쌓았고 그 결과 자신이 죽을 날을 알아 맞힐 정도가 됐다.

천문 교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하늘에는 태사성(太史星·천문 담당 벼슬을 상징하는 별)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 현상을 목격한 남사고의 상관은 자기가 세상 떠날 날이 되었다고 지레 짐작해, 동료들을 모아놓고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러자 남사고는 크게 웃으며 “죽을 사람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며칠 뒤 남사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사고와 퇴계 이황의 만남

남사고는 도술에도 능했다 하는데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 그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방문했을 때였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퇴계 집안은 검약하기 그지없어 밥상에는 보리밥과 고추장밖에 다른 반찬이 없었다. 남사고는 도술을 부려 잉어회를 만들었다. 그러자 퇴계는 손사래를 치며 남의 잉어를 빼앗아 먹을 수 없다며 한 점도 먹지 않았다.

설화 속의 퇴계는 실상 남사고보다 예언과 도술에 능통하다. 귀신에게 홀린 제자를 구해 주기도 하고,9대 자손에게 닥칠 위기를 미리 예견한다. 퇴계는 일찍이 여우의 구슬을 삼킨 적이 있어 축지법도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설화의 세계에서 보는 퇴계는 만능인간, 초월적 존재다. 이는 물론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민중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가 자기들의 편에 서서 따뜻한 보호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퇴계를 만능의 인간으로 형상화했다.

남사고가 밥상에 올린 잉어회를 퇴계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민중은 물론 남사고와 같은 예언가를 기꺼이 믿고 의지한다. 하지만 학덕이 높은 퇴계에게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남사고가 익힌 지리와 천문이 한낱 기술이라면, 퇴계의 학문은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의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민중의 인식을 본다.

 

십승지는 남사고의 작품인가

그렇다 해도 많은 사람들은 남사고의 특별한 지식과 능력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정감록’의 중심개념인 십승지설이 ‘남사고산수십승보길지지(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에서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민중은 남사고 같은 예언가라면 당연히 훌륭한 피란지를 점지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남사고’는 ‘정감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여러 산들 중에서 소백산(小白山)이 으뜸이요, 지리산(智異山)이 다음이다.”라고 했듯, 길지는 주로 소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큰 마디에 몰려 있다. 이를 지역별로 나눠 보면 경상도가 4개, 전라도 3개, 충청도 2개, 강원도 1개다.

‘남사고’의 이런 길지는 ‘정감록’외 다른 예언서에 나오는 한국 최고의 길지들과 대동소이하다.‘정감록’에 언급된 길지를 출현 빈도순으로 정리해보면, 경북 풍기, 충남 공주, 경남 가야산이 각 10회로 으뜸이다.

다음은 경북 안동으로 9회이며, 경북 예천과 전북 운봉은 각 7회, 태백산·소백산 및 충북 보은은 6회, 경북 개령·봉화, 강원 영월, 충청 단양, 전북 무주 및 부안이 각 5회로 각기 정상급 길지로 손꼽힐 만하다. 그밖에 충북 진천도 4회나 된다.

십승지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길지는 해안선이나 큰길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길지를 선정하게 된 이유가 전쟁, 전염병 및 흉년의 세 가지 피해(三災)를 벗어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해안지방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데다 조선후기엔 이양선의 출몰이 잦았고,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때 외적은 큰길을 따라 진군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로변과 해안은 길지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흉년이 들지 않는 장소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참 어려웠다.

그런데 최고의 길지 가운데는 전북 부안처럼 해안 고을도 있었다. 부안이 십승지로 부각된 것은 물론 다른 이유에서였다.

신라 말 민중적 미륵불교를 창시한 진표 스님이 미륵보살로부터 간자(簡子)를 받은 곳이 바로 부안이었다. 그때 이후 부안은 세상을 구할 진인이 출현할 땅으로 민중의 가슴속에 길이 기억됐다.

공주는 충청감영(忠淸監營)의 소재지로 조선시대엔 가장 큰 대로변에 위치했다. 그럼에도 계룡산이란 풍수상의 일대명산을 거느리고 있어, 길지 중의 길지로 손꼽혔다. ‘정감록’은 계룡산 사상 즉 진인이 계룡산에 도읍해 새 세상을 연다는 예언이 핵심이다. 따라서 공주를 빼놓은 길지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길지들, 특히 그 대표가 되는 십승지는 과연 남사고가 창안했을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남사고가 전국을 유람하며 길지를 점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남사고는 전국의 지세를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했다.‘산수비경’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만주 땅을 할퀴는 형상이다.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경북 포항의 영일만 동쪽에 있는 호미곶은 우리나라의 동쪽 끝 땅이다. 우리 땅을 용맹스러운 호랑이로 보고 그 꼬리라는 뜻에서 호미(虎尾)라 부른 남사고였다.

그는 전국의 여러 명당 가운데서도 유독 소백산을 중시했다.“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남사고’를 보면, 소백산 주변에 십승지의 상당수가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런 점에서 십승지설은 남사고의 뜻을 상당부분 반영한 것으로 믿어도 좋겠다.

그런데 사실 조선시대의 지관(地官)들은 누구나 전국의 길지를 논했다. 그들에겐 공통된 의견도 있었다. 태백산 이남에 길지가 많다는 것인데, 특히 소백산, 작성상(황장산), 주흘산, 희양산, 청화산, 속리산, 황악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남쪽 구간에 명당이 많다 했다. 십승지를 비롯한 전국의 길지는 남사고 한 사람이 모두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남사고는 선배 지관들이 앞서 제기한 논의를 일단 종합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시 후배들에게 이어지면서 길지에 관한 논의는 더욱 풍부해졌다.‘남사고’는 한 사람의 단독 저술로 간주되기 곤란하다. 그것은 18∼19세기 조선의 지관들이 선배들의 다양한 의견을 참작해 만든 공동저작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후배들은 전설적인 지관이며 명예언가인 남사고의 이름을 빌렸던 것이다.

‘남사고비결’도 여러 번 다시 쓰였다

영조 9년(1733)에 적발된 ‘정감록’ 사건엔 ‘남사고비결’이 등장한다. 무신년에는 피가 흘러 내(川)를 이룬다는 등 흉흉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실록·영조 9년8월18일 병인). 마침 영조 4년(1728) 무신년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남부지방을 휩쓸었던 터여서 조정은 이 ‘비결’의 등장에 경악했다.

이 ‘비결’과 제목이 똑같은 예언서는 현재도 남아 있다. 당연히 ‘정감록’에 포함돼 있다. 그러면 현존하는 ‘비결’은 영조 때 발각된 것과 같은 내용의 예언서일까?

“무신·기유(戊申己酉)년: 제갈량(諸葛亮·제갈공명)이 이미 죽었으니 어느 성 한쪽 금성(錦城)이 피폐하도다. 경시(更始·개혁의 시작)는 자리를 긁고 범증(范增)은 등창이 나는구나.”라고 하였다.

책사(策士)로 유명한 제갈공명과 범증이 이미 죽거나 병들었다 했다. 나라에는 제대로 일을 도모할 만한 신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판국이라 개혁은 제자리를 맴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쟁 또는 반란을 예언했다는 영조 때의 ‘비결’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비록 예언서의 명칭은 ‘남사고비결’이라 했지만 알고 보니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세상은 날로 바뀌기 마련이다. 따라서 후배 술사들은 새로운 내용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 예언서가 이미 알려진 예언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때로 새 술도 헌 부대에 넣으면 값비싼 명품으로 둔갑된다.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

 

남사고의 ‘격암유록’과 신종교

남사고는 예언계 최고의 브랜드였고, 그래서 끊임없이 이용됐다.19세기 말엔 ‘격암유록’이란 낯선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을 상당부분 모방하고, 그 무렵에 태동하고 있던 신종교의 선교에 도움이 될 내용을 덧붙인 것이었다.‘격암유록’은 뒷날 증산교의 종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일부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단체는 남사고가 지었다는 ‘궁을가’를 기꺼이 인용한다. 이 역시 위작(僞作)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궁궁을을”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궁궁”도 십자가,“을을” 역시 십자가라는 것이다.

역사상 남사고는 궁핍한 예언가였다. 하지만 후세의 사람들 중엔 그 이름을 팔아 기름진 음식과 호사를 누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민중이 남사고에게 걸었던 희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출처 : 연어알  |  글쓴이 : 북극해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