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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 공평한 성품과 탁월한 안목을 갖춘 인재 [역사인물탐구]

by 바로요거 2008. 10. 11.

 

[역사인물탐구] 공평한 성품과 탁월한 안목을 갖춘 인재, 진평

 


 


 지난 수천 년 동안 중원에서는 수많은 나라가 일어나고 망하였다. 한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해지면, 그 혼란을 바로잡고 새 나라를 세우는 창업군주와 그를 도운 명장들이 반드시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중국 역사의 영웅들 가운데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여러 공신들의 기운을 천지공사에 취하여 쓰셨다. 상제님께서 이들을 천지공사에 쓰신 것은, 세상이 뒤바뀌는 변혁기에 등장하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란한 질서를 바로잡은 이들의 능력과 재주를 높이 평가하시며, 이들을 일꾼들의 귀감으로 세우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고조의 공신들로는 소하(蕭何), 장량(張良), 한신(韓信), 진평(陳平) 등이 있다. 그 중 진평의 삶을 살펴보면서 상제님께서 진평의 고사를 말씀하시며 일깨워주신 일꾼의 덕목과, 우리가 일꾼으로서 진평에게 본받아야 할 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준희 _ 서울 광화문


 
 ‘진평이 분육(分肉)하듯 ’
 진평(?∼BCE178)은 양무(陽武)의 호유(戶�, 중국 하남성 난고현 동북쪽)사람이다. 젊은 시절 집은 가난했으나 책 읽기를 좋아했다. 진평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았으므로 간혹 그에게 “집도 가난한데 뭘 먹었길래 이토록 살이 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진평이 사는 마을에 사제(社祭,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었는데, 진평이 제사에 올린 고기를 나눠주는 재(宰)가 되자, 고기 나누는 것이 매우 공평해졌다.
 
 진평(陳平)이 분육(分肉)하듯 균일하게 나누어 먹으라. (道典 9:195:7)
 
 상제님께서 무신년 12월 차경석 성도의 집에서 경석의 부친 치구(致九)의 기제(忌祭)를 친히 받으시고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진평의 위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이때 왜 진평의 일화를 말씀하셨을까? 당시 동네 어른들이 진평의 공평한 고기 분배를 칭찬하자, 진평은 “아, 슬프다! 이 진평을 천하의 재상으로 삼더라도 고기 나누듯 공평할 것인데…”라고 하였다. 진평의 포부가 단순히 한 마을 제사의 고기 분배를 넘어 천하의 ‘고기’(복록)를 백성들에게 고루 나눠주고자 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천하를 공평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신명의 감화를 받고 모든 일에 성공이 있느니라.”(道典 8:93:6) 하신 상제님의 말씀대로, 진평에게 젊은 시절의 이러한 포부를 성공시킬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진나라 말기의 혼란이 그것이다.
 
 
 참 주인을 만나 재주를 발휘하다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 말기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진평은 처음에 위나라 공자 구를 섬겨 큰 계책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떤 사람의 헐뜯음까지 받자, 진평은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 항우에게로 갔다. 진평은 항우를 따라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항우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한편 항우에 의해 서쪽 한중에 묶여 있던 유방이 동쪽으로 진출할 때, 항우는 진평을 보내 그를 막게 하였으나, 유방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항우가 이에 분노하여 진평을 죽이려 하자, 진평은 유방에게 투항하였다. 진평은 유방에게 자신이 투항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다.
 
 “신이 위왕을 섬김에 위왕은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위왕을 떠나 항우를 섬겼습니다. 항우는 다른 사람은 믿지 못했고, 그가 오직 믿고 아끼는 사람은 항씨 일가가 아니면 그 처남들이었으니, 설령 뛰어난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중요하게 쓰이지 않으므로 이에 저는 항우를 떠난 것입니다. 대왕께서 사람을 잘 가려 쓰신다기에 대왕께 귀순한 것입니다.”
 
 유방은 그런 진평을 신임하여 호군중위(護軍中尉. 장군들의 행동을 감독하고 협조하는 벼슬)에 임명했다. 진평은 그의 참 주인인 유방을 만난 이후 그를 위해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려 몇 번이나 유방을 위기에서 구해내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야출동문 여자이천인’의 일화는, 바로 위기에 처한 유방을 구하기 위해 진평이 내놓은 계책 중 하나였다.
 
 
 야출동문 여자 이천인(夜出東門 女子二千人)
 BCE 205년 항우가 유방의 군량 보급로를 끊고 형양에서 유방을 포위하며 압박했다. 이때 진평은 유방에게 먼저 이간책을 제시했다. 그는 많은 돈을 풀어 초나라 군대에 첩자를 보내 항우와 그의 부하들 사이를 이간시켰다. 그 결과 항우의 핵심 책략가인 범증이 항우의 의심을 받아 항우를 떠나게 되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등창으로 죽고 말았다.
 
 범증을 항우에게서 쫓아낸 진평은 야밤을 틈타 유방으로 위장한 기신(紀信)과 갑옷 입은 군사로 꾸민 여자 2천 명을 동문으로 내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다. 이에 속은 항우가 방심한 틈을 타 진평은 유방을 모시고 서문으로 빠져나가 관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나니, 옛날에 진평(陳平)은 ‘야출동문(夜出東門) 여자 이천인(女子二千人)’ 하였느니라. (道典 8:61:3)
 
 상제님의 이 말씀은 위급한 상황에서 ‘남자만 군사로 쓸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여성도 군사로 내보낸 진평의 융통성과 기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관중으로 돌아온 유방은 다시 병력을 집결시켜 반격을 개시했다. 진평의 이간 공작으로 뛰어난 참모였던 범증을 잃은 항우는 이때부터 서서히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유방과 항우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양측이 임시로 휴전하자, 유방은 진평과 장량의 계책에 따라, 돌아가는 항우를 추격해 무찌르고 마침내 한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평은 유방을 모시면서 자신의 재능도 드날리고 한나라의 창업도 도울 수 있었다.
 
 
 한나라의 기틀을 다짐
 한나라가 건국된 이후 진평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썼다. 고조 6년(BCE 201), 초왕(楚王)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평은 “군대도 장수도 우리가 한신에 미치지 못한데 한신을 직접 공격하면 그들더러 반항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남방의 운몽호(雲夢湖)를 순행한다고 속이고 제후와 진(陳) 땅에서 회동해 주십시오. 진(陳)은 초(楚)의 서쪽에 있으니 천자가 나들이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한신이라도 스스로 마중나올 것입니다. 그때 힘센 사람 한 명이면 쉽게 그를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제안했다. 과연 한신은 방심하여 아무 대비 없이 유방을 마중 나왔다가 사로잡혔다.
 
 한신이 한고조의 명장으로 활약할 때, 이를 두려워한 항우는 무섭을 시켜 한신에게 “한고조를 배반하고 항우와 화친을 맺어 천하를 셋으로 나눠 왕이 되라”고 제안했었고, 괴통도 그와 같이 제안했었다. 그러나 한신은 한고조의 은혜를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1)
 
 하지만 진평을 비롯한 한고조의 참모들은 ‘한신이 모반할 가능성은 적지만 살려두면 언젠가 자신의 재능을 살려 모반할 수 있으니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한신을 잡은 후 고조는 진평을 ‘호유후’에 봉해주었는데, 진평이 자신을 천거하고 옹호해 준 위무지(魏無知)의 은혜를 언급하며 사양하자, 고조는 진평의 근본을 잊지 않는 자세를 칭찬하였다.
 
 한고조가 죽기 얼마 전, 연왕 노관이 모반하여 번쾌가 반란을 진압하러 나갔을 때, 고조의 황후인 여태후와 인척관계에 있던 번쾌를 죽이려 모함한 사람이 있었다. 고조는 진평과 주발에게 번쾌를 잡아죽일 것을 명했다. 이때 진평과 주발은 상의하여 번쾌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장안으로 연행한 후 죽이는 것은 고조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번쾌를 잡아서 돌아오는 도중에 고조가 죽자, 번쾌는 석방되고 권력은 여태후에게 돌아갔다. 만약 진평이 번쾌를 죽였다면 여태후는 진평을 살려뒀을까? 진평의 융통성과 대세를 보는 안목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고조는 죽음에 이르러, 여태후에게 소하와 조참을 이을 재상으로 왕릉을 지목하면서 “왕릉이 고지식하므로 진평이 돕도록 하는 것이 좋다. 진평은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혼자 큰일을 맡는 것은 어렵다.”고 평하였다.
 
 
 위기에 처한 사직을 구하다
 고조의 뒤를 이어 아들 혜제가 즉위했으나, 권력은 여태후가 쥐고 있었다. 혜제도 곧 죽자 여태후는 혜제의 아들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우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원래 한고조는 “유(劉)씨가 아닌 사람을 지방의 왕으로 삼으면 천하가 함께 쳐 없애라”2)는 원칙을 세웠으나, 여태후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친척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왕릉은 반대하였으나 진평은 동의하는 척하였다. 고지식한 왕릉이 진평을 꾸짖자 진평은 “지금 조정에서 직접 간언하는 것은 내가 당신만 못하오.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도 나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이는 진평이 뒷날 여태후 일파를 몰아내고 천자의 권력을 고조의 후손에게 돌려주고자 했음을 암시한다.
 
 여태후의 누이 여수는 “진평은 승상이 되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 술이나 마시며 부녀자를 희롱합니다.”라고 헐뜯었는데, 진평은 그 소식을 듣고 더욱 도를 넘게 행동했다. 진평은 혼자 여태후 일파를 몰아낼 힘은 없고, 여태후의 눈밖에 나면 목숨을 지킬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무능한 인간으로 인식시켜 생명의 안전을 꾀하고 훗날을 도모한 것이다. ‘여태후 일파에 뛰어난 인물이 없어 여태후가 죽으면 여씨 일파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므로,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순리대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때를 기다린 것이다.
 
 BCE 180년 여태후가 죽자 진평은 태위(太尉: 국방장관) 주발과 상의하여 꾀를 내어 여태후의 아우 여산과 여록을 속여 그들의 병권을 빼앗고 여씨 일파를 몰아냈다. 그리고 고조의 넷째 아들 유항을 새 황제[文帝]로 세워 유씨의 한나라를 다시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문제는 여씨 타도의 공을 세운 진평을 좌승상에 임명하였다. 2년 후 진평이 세상을 떠나자 문제는 그에게 헌후(獻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대세를 보는 안목과 공정한 성품의 힘
 사마천은 진평을 대략 이렇게 평가했다. “진평이 일찍이 도마 위의 제육(祭肉)을 나눌 때 그 포부는 이미 원대하였다. 그는 늘 기이한 계책을 내어 복잡한 분규를 해결하였고, 국가의 환난을 제거하였다. 여태후 때는 국가에 변고가 많았으나, 진평은 스스로 화를 면했고, 나라의 종묘사직을 안정시켜 영광스런 명성을 유지하고 어진 재상으로 칭송되었으니, 이 어찌 시작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진평이 마침내 성공한 것은 천하를 공평하게 하고자 한 성품과 대세를 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참 주인을 만나 재주와 충성을 다하였으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융통성을 발휘하여 적절한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도전』을 통해 후천 오만년 역사에 길이 남을 ‘진평의 분육’은 그의 성품에서, ‘야출동문 여자 이천인’은 그의 안목과 융통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평은 과연 일꾼의 귀감이 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인재라 하겠다.
 
 
 <참고문헌>
 사마천 저, 정범진 등역, 『사기』 (까치, 1994)
  반고 저, 『한서』 (중화서국, 1962)
 김희영 저, 『이야기 중국사』 (청아, 2006)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7.02월호 http://www.greatope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