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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차 한잔 쉼터/좋은글*명언*사상철학

호랑이 이야기

by 바로요거 2008. 1. 24.

 

호랑이 이야기!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가 목숨을 건진 어린이!

지금부터 호랑이 이야기의 그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아래 소개되는 이야기는 6,25동란 시절 중국의 연변의 한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직접 그 당시에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가 목숨을 건진 기적같은 체험담을

듣고서 기록한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물론

“옛날 옛적의 한 옛날에 ------”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꺼리로나 나올 소재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전설 속에나 나올 실제 주인공을 중국 연길의 한 식당에서 만났었다.


배고픈 호랑이가 만찬의 첫 손질로 오른쪽 턱에서 목에 걸쳐 붙여준

끔찍한 흉터가 생생히 보이는 중국 동포 조종원 씨는 50이 훨씬 넘은

전직 공무원 은퇴 생활자로 부인은 서울로 돈 벌이 나갔고 외지로 자녀들은

출가한 빈집에서 홀아비로 혼자 외롭게 사는 처지였다.


처음에는 자기는 남들에게 내세우기 싫은

호랑이에게 죽다 살은 이야기를 한마디 듣자고 서울서 날아온 나에게

당혹과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경계를 하면서 좀체 입을 열지 않았었다.

그러나 불고기 한판에 중국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말문을 열고 보니 상당한 친화력도 있고 재미있는 분이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도 가을,

연길에 가까운 광진 촌[지금은 신광 촌으로 개명]에서 가을걷이가 시작 되었지만

날씨는 아직 별로 춥지가 않아 동네한의 어린이들은 빈터에 모여

밤늦게까지 놀이를 하곤 했었다


해가 거의 다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마을 산자락에 가까운 공터에서 여자 어린이들이 “제기 뿌리기”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두 어린이가 콩이나 쌀을 넣은 주머니를 서로 주고받으며 가운데 네모 칸의 안에서

이리저리 피하는 여러 명의 어린이들을 맞추는 놀이였다.

옛날에 한국에서도 많이 하던 놀이로서 오자미 놀이라고 불렀었다.

어린이들은 그 작은 오자미에 맞으면 맞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여자 어린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본 여섯 살짜리 종원은 심술이 났다.

종원이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

그는 다짜고짜 놀이판에 뛰어들어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화가 난 어린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종원을 나가라고 하면서도 즐거운 놀이는 계속했다.

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그리고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터 옆 민가 모서리를 누런 구름 같은 것이 소리 없이 돌아 나타나서 어린이들을 덮쳤다.

처음 그것을 본 어린이는 공포로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 누런 구름은 공터 언저리의 어린이들을 손도 안대고 앞으로 5~6미터를 더 전진해서

놀이판 중앙에 있는 종원을 덥석 물고서 또 다시 바람처럼 마을 밖으로 사라졌다.


공포로 얼어붙었던 어린이들은 그제야 째지는 비명을 지르고 각자 집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놀랜 어른들이 뛰쳐나와서 살펴볼 때는 이미

그 누런 뭉치는 유유히 논둑을 타고 산으로 향하고 있는 참이었다.


호랑이였다.

호랑이!


호랑이가 그 인근에서 사람을 물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연변 지방에서 거의 보이지 않던 호랑이들이

한국 전쟁이 격화되자

두만강 이북 그 쪽 땅에도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이 호랑이들은 북한에서 건너온 호랑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영물(靈物)이라서 자신들이 사는 땅이 전쟁터가 됐음을 알고

두만강을 건너 피난을 왔다는 이야기였다.


사람에 대한 공격도 가끔 일어났었다.

사흘 전에도 10리 떨어진 마을에서 남순이라는 여자 아이가

호랑이에게 물려가서 행방불명이 된 뒤 시체를 찾지 못한 터였다.


호랑이가 중국으로 대거 몰려 온 이유에 대한 연변 어른들 말씀은 일리가 있다.

북한의 호랑이들을 대거 중국으로 피난가게 만든 가해자들은

미국 공군과 해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일 것이다.

남쪽에 사는 우리들은 잘 모르지만 침략자를 수령으로 둔 덕택에

북한 주민들이 전쟁 삼 년간 폭격으로 당한 피해는 상상을 못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건물이나 다리 등은 온전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었고

죄 없이 죽은 주민들은 수십만 명이었다.

심할 때는 전 마을 주민이 멀쩡한 집들을 놔두고

산속의 솔밭에서 한 달여씩 숨어 지내기도 했었다.


북한 전역 하늘에는 항상 미군기 들이 끊임없이 날아 다녔고

전투지역에서는 전투기들의 숫자가

마치 가을하늘의 고추잠자리 떼를 연상하리만큼 많았다고 한다.


낮에는 제트 전투기가 폭음을 내며 하늘을 갈고 다니고

밤에는 B 26같은 폭격기가 야간 폭격을 하러 요란하게 돌아다니니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호랑이가 불안해서

그런 소리가 없는 두만강 건너로 대거 이주한 것이 맞는 사실이리라.


종원이가 호랑이에게 물려 간 뒤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마을 어른들도 뛰어나와 즉시 구조에 착수했다.

민병대를 소집해서 무장하기 시작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담한 마을 주민 서너 명은 즉시 논길로 달려가 호랑이를 쫓기 시작했다.


한편,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훼방 놓던 종원은

뭔가 엄청난 힘이 자신을 덮치고 머리를 뭐로 맞은 것같이 심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지만

다시 짧은 동안 의식이 돌아왔다.

무슨 짐승이 자기의 머리를 물고 마을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종원이 그 짐승이 호랑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건너 마을 황 씨라는 중국 사람의 집에서 키우는 커다란 개가 자신을 물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원은 울면서 외쳤다. “ 놔! 이 황가 놈의 개야 ! 빨리 놔!”

그렇게 울면서 악을 몇 번 써보았지만 금세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다시 정신이 들었다.

보니 호랑이가 논길 중간에 서서 꼬리로 논고랑의 물을 찍어 종원의 얼굴과 목에 끼얹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종원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때 용감하게 뒤쫓아 온 동네 어른들이 따라 붙었다.


논 뜰을 다 벗어난 산자락에서 이었다.

어른들은 마구 고함을 치고 호랑이에게 겁을 주었다.

한 사람은 성냥으로

여기저기서 급히 긁어모은 낙엽과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위협적으로 흔들어 댔다.

사람들이 불까지 흔들며 겁을 주자 호랑이도 긴장을 한 것 같았다.

호랑이는 종원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몇 보 뒤로 물러나서 사람들을 쏘아 봤다.


사람들은 더욱 소리를 크게 지르며 몇 보 접근하니까 호랑이도 몇 보 후퇴했지만

힘들게 마련한 저녁꺼리를 쉽게 포기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


그때 일행 중 담력이 센 남씨라는 분이

주먹만한 돌 두 개를 양손으로 마주치며 땅에 쓰러진 종원에게 접근했다.

“ 딱! 딱!” 조용한 산자락에 돌의 파열음이 날카롭게 퍼져나갔다.

호랑이는 돌 부딪히는 소리에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틈을 노려서 남씨는 얼른 종원을 들쳐 엎고 산 아래로 내리 뛰었다.

남은 사람들이 계속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돌을 마주치며 겁을 주는 데에다가

마을에서 수십 명의 민병대가 달려오는 것을 본 호랑이는 단념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종원은 급히 연길의 큰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다음날 아침에야 정신이 들었지만 혼이 나가서 그저 멍한 상태에 있었다.


다른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가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온 아버지는 종원을 껴안고

“하느님이 도와서 네가 살았구나.” 라고 목이 메어 이야기 할 때야

종원은 자기가 살아난 것이 큰 기적이었다는 사실에 실감이 나서 눈물을 터뜨렸다.


잠깐 여기서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고 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이 호랑이가 사람을 습격한 사건에서 처럼

우리나라에서 그저 구전 동화처럼 오랫동안 호랑이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들이

놀랄 만큼 정확한 호랑이의 생태학적 정보를 전해 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옛날에 아기들이 울면 엄마는 “울지 마! 밖에 호랑이 왔다!”하며 달래던 것이

자장가처럼 거의 관습화 되어 온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아기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호랑이를 들먹인 것이 아니다.

아기가 울면 진짜로 호랑이가 찾아 왔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을 이 사건이 보여준다.


호랑이는 야행성이라 대개 어두워진 밤에 출동 하는데

이번에는 초저녁도 되기 전에 종원의 마을을 습격 하는 무리수를 두었었다.


이유는?

바로 여자 어린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소프라노로 질러댔던 즐거운 비명들이

근처 산에서 휴식을 취하던 호랑이의 식욕을 한없이 간질여 댔기 때문이다.


육식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이 지르는 비명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비명을 지른다는 것은

곤란한 지경에 처해서 도주를 하기가 힘든 상태의 먹잇감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소리가 들리면

작게는 들 고양이에서 크게는 호랑이나 사자 같은 야수들은 즉시 소리의 진원지로 달려든다.


그래서 야수들은 어지간한 고통에도 비명을 잘 지르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서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 기르는 개는

어쩌다가 주인에게 발길로 채 이기라도 한다면 죽을 듯이 요란한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개의 사촌격인 이리들은

총에 맞아서 내장이 밖으로 노출이 되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옛날 한반도에 호랑이들이 우굴우굴 했을 때

산촌의 야간에 아기의 울음소리는 멀리까지 들렸었고

이 울음소리는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들으면 짐승들의 비명 소리로 오해하기 좋다.

그러니 아기 울음소리는

호랑이들에게 여기에 잡아먹기 좋은 먹잇감이 있다고 알려주는 음성 메시지와 다를 바 없었다.


호랑이는 당연히 마을로 내려가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집 근처를 어슬렁 거렸을 것이고

이를 눈치 챈 아기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기를 달래느라고 애를 썼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옛 전설이, 이 사건이 진실임을 증명해준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호랑이에게 기묘한 습성이 있었다.

호랑이들이 가끔 주막집을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주막집이란 밥과 숙소를 제공하는 곳이라서

큰 방에 사람들이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같이 어울려 잤던 곳이다.


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더위를 참지 못해 문을 열어놓고 자면

호랑이는 슬그머니 들어와서 사람을 물고 도망쳤는데, 이 때 이상한 습성을 보였다.


사람을 물어가되 방문 맨 앞의 한두 사람은 그냥 건너뛰고

꼭 방 중앙의 사람을 물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물려갈 팔자가 따로 있다고 했었다.

호랑이가 그런 사람만 귀신같이 알고 찍어서 잡아 갔다는 것이다.

옛 사주 책에 자주 나타나는 호환(虎患)이라는 운세는

이와 같이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다.[요새는 그 운세가 교통사고로 바뀌었다.]


종원을 습격한 호랑이도

주변의 여자 아이들은 그냥 건너뛰고 중앙에 있었던 종원을 물어갔었다.

조종원 씨는 나에게 자신의 수난을 들려주면서 그것이 참 이상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그의 경험은 위의 속설이 정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다른 하나,

호랑이가 꼬리로 물을 적셔서 종원에게 뿌렸다는 것,

이것도 증명해주는 사실이 있다.

호랑이는 아마 죽은 것보다 산 것을 좋아 하는 듯하다.

옛날이야기에 술을 마시고 가다가 너무 취해서 길가에 쓰러져 자던 농부를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적셔서 위와 같이 깨웠다는 동화속의 이야기 같은 기록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종원의 일화가 사실일수 있다고 증명해준다.


그리고 더 하나.

종원을 구한 남씨라는 주민이

돌을 맞부딪히며 호랑이를 견제했다는데 이분은 뭔가 아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호랑이들은 물론 동물들은 이런 파열음을 아주 싫어한다.

앞글에서 고구려 명적의 효과를 소개한바있다.

옛날 깊은 산속을 오고가는 스님들은

긴 지팡이 위 끝에 너덧 개의 쇠고리를 달아서 걸을 때마다

철커덕 철커덕하는 쇳소리가 나게 했었는데

이는 호랑이가 이런 금속성 소리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여튼 종원 소년은 문자 그대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소학교에 다닐 때는 반의 친구들이 그를 ‘범 밑바시’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별로 흉터에 구애 받지 않고 씩씩하게 자랐다.

[밑바시란 함경도 방언으로 음식 찌꺼기를 가리킨다.]


그는 성장해서 공무원직에 투신하여 향장(鄕長-우리나라의 면장)으로

정년 퇴직 할 때까지 삼십년의 세월을 국가에 봉사했다.


조종원씨는 거나하게 취하자, 첫 번의 경계하던 모습을 다 버리고

자기가 당했던 호환(虎患)의 경험을 구수하게 이야기 했다.

이야기는 호랑이를 뛰어 넘어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이야기들로 옮겨갔다.


그는 자기가 가진 흉터가 앞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머리를 숙여 뒤쪽에 길게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10센티 이상 길게 찢어진 상처였다.


무슨 긴 몽둥이로 맞은 상처 같았다.

앞쪽의 흉터는 호랑이가 선사 한 것이었지만

뒤쪽 흉터는 다른 맹수가 선사한 것이었다.


60년대에 그는

호랑이보다 더 고약하고 지독한 동물들을 만나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모택동이 잘못 만들어 낸 소위 홍위병이라고 하는 붉은 동물들이었다.

이름이야 그럴듯했지만 그들이 해댄 행적을 보니

홍위병들은 국가가 공인해준 조직 폭력배들이었다.


그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들에게 끌려가서

심하게 구타당하고 고깔 모자를 쓰고 군중들 앞에서 조리 돌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봉변을 ‘투쟁 당했다’고 한다.]


조종원씨는 호랑이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남의 이야기 하듯 담담하게 말하면서

한 마디도 호랑이를 원망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홍위병의 이야기가 나오자

분노와 증오에 찬 목소리로 여러 번이나 홍위병들의 행패를 성토했다.

“그 것들, 짐승보다도 못한 것들이었소.”


나는 흥분한 조종원씨를 보다가 또 다시 문득 느꼈다.

호랑이에 관한 옛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머리에 떠오른 관련 이야기는 성인 공자님의 일화였다.

그 일화를 아예 야후에서 퍼다가 여기 옮긴다.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태산의 한적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여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가 하도 슬퍼서 공자는 수레 앞에 몸을 기대고 듣다가,

자로에게 여인에게 가서 사연을 알아보라고 했다.

「부인의 울음소릴 들어보니, 마치 슬픈 일을 몇 번이나 당한듯한데,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부인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 일대는 아주 무서운 곳이죠.

옛날 저의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는데,

얼마 전에는 제 남편이 호랑이에게 죽었고,

이번에는 제 자식이 또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아니, 그럼 이 무서운 곳에서 왜 떠나지 않습니까?」

「여기서 살면 무거운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가슴에 잘 새겨두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유명한 공자님의 가르침인 -苛政猛於虎-의 일화이다.


종원을 물어 가다가 흉터만 남겨 주고 실패했던 호랑이는 또한

공자님의 가르침이 백번 옳다는 가르침도 남겨 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