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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단 한번의 패전이 없는 연개소문

by 바로요거 2007. 10. 9.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단 한번의 패전이 없는 연개소문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유일한 중심인물

기사입력 2005-10-10 11:26 | 최종수정 2005-10-10 11:26

 

<단 한 번의 패전이 없는 연개소문>

당태종이 649년 세상을 떠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단시켰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황 원갑은 이 부분도 허구라고 적었다. 당 태종은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에 설욕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30만 대군으로 제4차 고구려원정을 꾀하다 사망했다. 만약 원정을 피하라는 그의 유언이 있었다면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고종은 당 태종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보장왕 14년(655)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했으나 실패했다. 보장왕 17년(658)에도 정명진과 설인귀 등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대군을 공격했지만 역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662년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해 고구려의 위기가 고조됐지만 연개소문이 직접 나서 당의 장수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사수(蛇水) 전투에서 몰살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자 소정방이 평양 포위를 풀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20여년간 당나라와 전쟁서 계속 승리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싸움에서 연개소문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가 죽을 때까지 고구려는 무려 20여 년간 당과의 전쟁에서 줄곧 승리한 것이다.

결국 중국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와의 연합에 박차를 가한다. 나ㆍ당 연합에 대해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반당 연합세력을 형성한다.

결론적이지만 연개소문이 665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 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 장면 그림, 칼 한 자루를 쥐고 말 탄 장수가 연개소문이고, 화살을 겨누는 장수는 설인귀, 칼 4자루가 날아가는 곳에 있는 말 탄 사람이 당 태종 이세민이다.

고구려가 멸망될 당시의 상황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가언충의 이야기로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는 668년 2월 시어사로 요동 전선에 파견되었는데 고종에게 고구려는 반드시 평정된다고 말했다. 고종이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가언충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수 양제가 동쪽으로 정벌에 나섰으나 승리하지 못한 것은 원한으로 민심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선제(태종)께서도 이들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고구려가 빈틈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구려는 쇠약해졌고 권신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운 후에 남건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남생은 내부(來附)가 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저의 길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명철하시고 초인적인 도덕과 지혜를 지니셨고 국가는 부강하며 장교와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고구려 내의 권력 다툼을 이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여러 해 계속 기근이 들었고 종종 괴이한 자연 현상이 발생해 민심은 놀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을 단 시간 내에 볼 수 있을 겁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 멸망

 


그의 예리한 분석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668년 9월 당나라군이 총공격을 위해 압록책으로 진격하자 고구려도 반격했지만 이적 등에 대패했다. 설필하력의 군대가 먼저 평양성에 도착했고 이적의 군대도 합류하여 평양을 한 달 가량 포위했다.

고구려의 왕 보장(고장으로 적힘)은 천남산(연래 연남산이지만 당 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으므로 연을 천으로 사용했다)에게 수령 98명을 인솔하고 백기를 들고 가서 이적을 배알하고 항복의 뜻을 전하도록 했다.

반면에 천남건(연남건)은 문을 굳게 잠그고 여러 차례 고구려 군을 독려하여 당군과 맞섰으나 모두 패배했다. 천남건이 군사 일을 신성(信誠)에 의지했는데 그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이적을 배알하고 내통했다. 5일 후 신성은 평양성문을 열어주었고 이적의 군대가 들어왔다. 천남건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끝내 생포되면서 고구려는 완전히 멸망했다.

668년 12월 당나라 조정은 항복을 받아들이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후 당고종은 항복한 고구려 지배자들에게 무마책을 벌였다. 보장왕을 사평태상백, 왼외동정으로 삼았고 천남산은 사재소경, 신성을 은청광록대부, 천남생은 우위대장군에 임명했다. 반면에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생포된 남건은 검증으로 유배되었다.

고종은 5부, 176성, 69만여 호로 되어 있는 고구려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통치하는 등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는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죽을 때까지 중국을 괴롭힌 연개소문에 대해 중국인들이 극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정종목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명예를 깎기 위해 연개소문은 태종의 침공을 받은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욱 포악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중국 경극에도 나오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등 확인된 종류만 해도 네 종류가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줄거리가 비슷하다고 네티즌 ‘21세기 무인’은 적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신채호 생가, 단재는 연개소문이야말로 우리나라의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고 극찬했다(사진 지열쓰 jiyouls).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르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푸른빛의 얼굴 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중국인들,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 경극 통해 표현

 


이들 경극에서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던 중국인들의 바램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인들의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는 앞에 설명한 패주하는 당나라를 추격하는 또 다른 설명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단원의 많은 부분을 이동식 KBS팀장의 『길이 멀어 못갈곳 없네』에서 인용한다.

당태종은 안시성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고구려 정복을 포기하고 645년 9월 철수하기 시작하여 10월에 임유관 즉 현재의 산해관에 입성한 후 11월에 유주(幽州)에서 군사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

당나라 때 유주는 현재의 북경으로 당나라 동북방 방위의 거점도시이다. 그런데 패주하는 당 태종을 고구려군이 아무 탈 없이 임유관에서 북경까지 보낸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추적한 사람이 단재 신채호이다.

신채호는 앞에 설명한 황량대로 불리는 지명이 10여 곳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북경 조양문 밖 7리 되는 곳에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조양문 밖이라면 현재의 북경시 조양구이다.

이동식은 천진 계주 동남쪽 20여 리 떨어진 왕강장(王杠庄)에서 이리점(二利店) 사이에 20여 기의 합장 분묘가 있음에 주목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군의 추적을 받아 계속 패주하다가 계주 방면에서 숨을 돌리고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태종 스스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여 모두 20개의 크고 깊은 구덩이가 파졌고 한 구덩이마다 만여 구의 시체가 들어갔다. 여기에 흙을 덮으니 마치 돈대(墩臺)와 같아 적골돈(積骨墩, 시체가 쌓인 돈대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태종은 3년 후에 이곳을 찾아 적골돈 대신에 ‘적곡돈(積穀墩)’으로 바꾸었다. 시체가 아니라 곡식이 쌓인 돈대로 바뀐 것이다. 이를 태종이 고구려의 추격을 겁내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고 군량미로 겉을 가려놓아 고구려군이 양식이 많을 것으로 보고 쫓아오는 것을 겁나게 했다는 설명도 있다.

계주는 오늘날 계현인데 북경에서 동쪽으로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적곡돈의 이야기는 황량대와 비슷하다. 단재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적곡돈이라는 촌사람들의 말을 듣고 황량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당에 투항한 남생의 묘지석, 중국 하남성 낙양 근처에서 출토되었다(이덕일 사진).

여기에서 우리들의 관심은 실제로 고구려군이 어디까지 추격했는가이다. 북경 동쪽에 경동에서 제일이라는 반산(盤山)이 있다. 전설로는 고구려군이 이곳까지 추격했는데 당태종이 왕강장에 살고 있던 한 노인과 청년에 의해 극적으로 고구려군의 추적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반산과 계현 일대에 절을 세우도록 했는데 보적사, 천성사, 반곡사, 감화사 등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천진시 계현에서 산해관 쪽으로 20킬로미터를 가면 마신교진(馬伸橋鎭)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고구려병과 당 태종의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서 당태종이 어마(御馬)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자 석재로 된 말과 다리 10여 개를 설치하게 하고 지명을 어마신요구가교(御馬伸腰救駕橋, 어마가 허리를 펴서 황제의 가마를 구한 다리)라 부르도록 했으며 마을 안에 어마묘(御馬廟, 어마를 모시는 사당), 삼의묘(三義廟) 등을 세우게 했다. 후에 다리 이름을 ‘마신교(馬伸橋)라 불렀다.

 

고구려군 북경 인근까지 진출설도

 


이러한 전설들을 토대로 하면 당 태종이 북경 인근의 반산까지 쫓겨 들어갔다는 말이 신빙성을 갖는다. 한편 신채호는 북경 인근의 순의현(順義縣)에 있는 고려영(高麗營)을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주장했는데 반해 이동식은 당나라가 고구려인들을 옮겨서 정주하도록 했다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적었다. 또한 고구려군이 북경까지 진출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북경이 아니라 북경 동쪽 90킬로미터까지가 보다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고구려군이 북경 바로 동쪽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과거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이 어떻게 중국의 중원까지 진출했을 수 있느냐며 부정적으로 보던 시각과는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근래 학자들의 설명은 단호하다. 중국의 경극에서 비도(飛刀)를 휘두르는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연개소문과 고구려군의 활약은 앞에 설명한 것보다 오히려 더 탁월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베일에 가려있는 연개소문의 생애>

연개소문의 업적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적 증거가 있지만 정작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데 단재는 당나라 사람 장열(張悅)의 『규염객전』을 소개하면서 규염객이 곧 연개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병기 박사의 글에서 인용한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이다. 수나라 양제 때 중국의 태원에 이르러 이정(李靖)과 교분을 맺고 이정의 처 홍불지(紅拂枝)와 남매의 의를 맺었다. 중국의 제왕이 되기를 도모하다 당공(唐公) 이연의 아들 이세민을 보고는 그 영명한 기운에 눌려 이정에게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한다고 고한 후 귀국해 난을 일으켜 부여국왕이 되었다.’

단재는 여기서 부여국이란 곧 고구려를 뜻하는데, 당 태종의 기운에 눌려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했다는 것은 중국의 권징적 필법일 뿐이라고 했다.

또한 단재는 연개소문의 탄생 및 성장과 관련한 중국 소설 『갓쉰동전』을 소개했다. 갓쉰동이라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를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으므로 갓쉰동은 곧 연개소문을 의미한다.

『갓쉰동전』은 국내 지명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주목의 속현인 주천현이 일명 학성(鶴城)인데, 갓쉰동을 내다 버렸다는 원주 학성과 같다. 본래는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이었으나 신라 때 주천현(酒泉縣)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 고조의 이름 이연(李淵)을 피해 중국 기록들이 천(泉)씨라고 적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지만 ‘주연현’, ‘주천현’ 등 연과 천은 서로 상통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실제 이 연의 이름을 피해 바꾼 것인지는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는 지적도 있다.

 

강화도 일대서 무예 닦았다는 전설 남아

 


강화도 일대에도 연개소문과 관한 전설이 남아 있다.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북쪽 시루미산에서 태어나 치마대(馳馬臺)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다는 것인데, 이곳에는 현재 연개소문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이 있는 ‘고인돌 공원’ 에 있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연개소문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아, 우리 연개소문은 우리 광개토왕의 자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는 말 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나는 이것으로서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다.'

강화도 연개소문 유허비.



신채호가 연개소문을 극찬한 것은 다음 같은 이유에서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해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고 이를 위해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살해해 자신의 독무대를 만들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했으니, 그 선악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이유>

수나라가 612년에 고구려를 침공할 때부터 668년 당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끈질긴 침공 기사를 읽으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수와 당은 고구려와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처럼 집요하게 고구려를 공격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제시했는데 이곳에서는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진시황제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한족과 북방기마민족(흉노)이다. 한족의 왕조가 쇠퇴하면 북방기마민족이 치고 들어와 영토를 점거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진시황 이후 중원 패권 북방기마민족이 차지

 


그 시작이 오호십육국(1五胡十六國)이었고 이를 회복하고 중국을 통합한 나라가 수와 당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매우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시대를 '혼란기' 혹은 '암흑기'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시기에 서진이 흉노족에게 점령당한 후 한족이 대거 강남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위나라를 이어받은 서진이 단명하자, 사마예가 강남땅에서 동진을 일으키고 화북지역에는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라 해서 갈, 저, 흉노, 선비, 강족 등 많은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저족 출신의 부견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전진왕조를 세우고 강남의 동진과 대치한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한족은 외래문명에 대해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민족인 다수의 기마민족 왕조가 세워지자 자연적으로 한족도 외래 문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불교수용도 그 중 하나로 설명된다.

고구려 멸망 때의 상황.

후한 말에 들어온 불교가 이때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됐는데 이는 북방의 소위 ‘오랑캐 왕조' 즉 기마유목민족 계열이 들어선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이 중국사에서 이 시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번한잡거'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이민족과 한족이 같은 화북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 민족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국의 통치를 사실상 흉노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할 결과로 볼 수 있다. 북조 중에서도 북위 효문제 시대에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폈는데 그는 선비족이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과 결혼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수문제 · 당고조 모두 한족아닌 이민족 출신

 


그런데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와 당나라도 족보를 따진다면 모두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이라는 점이다. 수문제는 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 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도 한족 출신이 아니다. 이연도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연은 당 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노자의 성은 이씨임)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 학자들은 이연이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이 이씨 성을 하사하는 관례에 따라 이씨 성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당태종의 충복으로 볼 수 있는 장손무기는 당고조 이연과 같은 척발씨로 북위 때 전공을 많이 세워 성씨를 장손(長孫)으로 바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북주의 표기대장군이고 아버지는 수나라의 우효위장군이며 그의 여동생이 태종의 처 문덕황후다. 그는 혈통이 척발씨이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세민과 절친하게 지냈다.

태종의 또 다른 충복인 우지녕도 선비족의 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동주총관을 지냈고 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내사사인을 지내는 등 정통적인 북방기마민족 가문이다.

중국을 사실상 통치한 오호십육국들의 원래 시발점은 고구려처럼 북방기마민족으로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이었다. 그 정도의 작은 집단도 경우에 따라서는 통일왕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기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북방기마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고구려 정복에 성공한 당 고종,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해 천하를 통일했으나 왕비인 측천무후가 690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창건해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됨으로써 가장 무능한 황제로 낙인찍혔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중국의 역사는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 중국 선제공격 사실 잘 알려져


요동방어선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국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중국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돈황문서란 중국 3대 석굴 유적 중 하나인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일컫는 말로써 20세기 초반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약탈돼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 주로 보관돼 있다.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돈황문서의 하나로 프랑스로 반출됐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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