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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마두(利瑪竇)는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친 사람이라. 현 해원시대에 신명계의 주벽(主壁)이 되나니 이를 아는 자는 마땅히 경홀치 말지어다. |
2 | 그러나 그 공덕을 은미(隱微) 중에 끼쳤으므로 세계는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 |
3 | 서양 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
4 |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
5 |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
6 |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
7 |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
8 |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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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
10 |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
11 |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중략) 증산도 도전 참조 |
카톨릭 예수회 신부였던 이마두(利瑪竇, Matteo Ricci) 대성사는 선교지 중국에서 동서양 문화를 번역하고 『천주실의』를 집필하는 등 동서문화 교류의 다리를 놓은 최초의 세계인이었다. 죽어서는 천상에서 상제님을 배알하고 이 세상에 모시고 내려온 지상최고의 공덕자가 된다. 오늘날 조상신을 거부하는 개신교에 반해, 카톨릭 문화에서 조상숭배의 제사문화를 인정하게 된 것은 모두 이마두 대성사의 노력 덕분이다.
“이 길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길”
리치 대성사는 1571년, 19세때 명문대 법과공부를 접어두고 로마 예수회의 수사가 되었다. 20대 시절 고향을 떠나 인도로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이 길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길이다. 이제 땅에서는 부모도 형제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중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카톨릭의 선교사로서 31세(1582년)때 중국에 건너간 신부님은 스님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착용하고 전도한 지 13년만인 44세(1595년)에 이르러 중국의 남경에 들어간다. 거기서는 유학자처럼 생활하며 선교사로 활동했는데, 마카오에서 남경으로, 다시 북경(北京)으로 오기까지 20여년의 세월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마침내 중국예수회 관구장에 취임하면서 중국의 황제를 만나게 되고, 신부로서 평생의 소원대로 중국의 최고지도자 황제에게 카톨릭을 포함한 서양문화를 전해주게 된다.
24절기를 체계화하고 시헌(時憲)이라는 호를 쓰다
중국에 와서 동방문화를 접한 대성사는 동서문화의 다양성에 눈뜨고 동양문화에 대한 깊은 안목을 바탕으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구도자가 된다. 신부님은 중국생활에서 유럽과는 다른 또 하나의 찬란한 문명을 발견한다. 유교, 불교, 도가, 양자, 묵자 등 중국문화를 깊이 공부하여, 사서 등의 책을 라틴어로 번역해 서양에 알리기도 했으며, 반대로 서양의 학술, 천문학, 수학 등 당시에 싹트고 있던 근대문명을 중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아세아(亞細亞), 구라파(歐羅巴) 등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용어들이 마테오 리치 신부님이 만들어낸 서양언어의 한자 표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시헌(時憲)이라는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사람으로서 동양의 24절기를 체계화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천주(天主)는 곧 상제(上帝)다”
신부님은 예수회에 보낸 편지에서 ‘(종교문제만 제외한다면) 중국의 위대함은 아무리 보아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적기까지 했다. 그만큼 누구보다도 동양의 학문과 문화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신부님이 모시고 있는 천주(天主)와 유교의 하늘(天)과 상제(上帝)님 신앙이 맥이 통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서두에서 신부님은 ‘천주는 경서(經書)에 나오는 상제(上帝)와 동일한 분’이라 정의하였으며, 고대의 천(天)사상으로 돌아가 거기서 상제를 만나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오늘날 천주교의 ‘천주(天主)’라는 말은 리치 신부님이 지은 『천주실의』를 우리나라 실학자들이 국내에 도입하여 일반화된 말이다.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문화 인정
또한 이마두 대성사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유교의 관습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라기보다 조상을 공경하는 예법으로 보고,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문화도 인정하게 된다(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리치 신부님이 별세한(1610) 105년 후(1715)에 중국의 카톨릭 교인이 조상숭배를 비롯한 유교 제례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마두의 공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천지신명들이 그를 떠받드나니, 이마두는 신명계(神明界)의 주벽(主壁)이니라.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너희는 마땅히 공경할지니라. (道典 4:11)
만약 당신이 지금 휴대폰 컴퓨터 자동차를 사용하고 있다면, 만약 당신이 극장에서 감동적인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훔친 적이 있다면, 만약 당신이 좋은 옷을 입고 기분이 너무 좋아 활짝 웃어본 적이 있다면, 마테오 리치 신부님께 마땅히 매일매일 지극한 감사기도를 올려야 한다.
바로 마테오 리치 신부님의 은덕으로 오늘의 당신이 갖가지 문명이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 신부님은 1552년 10월 6일, 천주교의 본고장 이탈리아 안코네(Ancone)주 마체라타(Macerata)에 있는 귀족 집안에서 9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치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만 19세 되던 1571년에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입회하였다. 동양에 전도할 뜻을 품고 1578년 인도에 도착, 1581년(만 29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마테오 리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히라가와 스케히로’는, 마테오 리치 신부님을 지구상에 출현한 최초의 세계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테오 리치에 의해) 지구는 처음으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자연과학 지식과 중국의 사서오경 등의 학문을 두루 갖춘 인간은 마테오 리치가 최초였던 것이다."
(히라가와 스케히로, 『마테오 리치, 동서문명 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358쪽, 동아시아, 2002)
리치 신부님은 워낙 고생이 많아 50대 후반에 이르러 세상을 뜨기 직전에는 이미 머리가 백발이 되어 있었다.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외길 인생을 걸으시던 리치 신부님은, 1610년 5월 11일 저녁 6시 북경에서 운명하셨다.
그가 숨졌을 때 중국인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이라고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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