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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황금의 나라 신라

by 바로요거 2007. 1. 31.
‘왕은 금관을 쓰지않았다’
-황금의 나라 신라…이한상/김영사-

‘신라가 황금의 나라’임이 분명하다. 옛 신라영토에서 출토된 금 귀고리만 보더라도 고구려(20여점)·백제(40여점)와는 비교가 안되는 700여점이나 된다. 찬란한 금관은 또 어떨까.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확인된 금관은 10여점. 그 중 5점이 경주출토품이다.

아랍의 알 이드리시가 쓴 기행문(‘天涯橫斷渴望者의 산책’)에는 “신라에는 금이 너무 흔해서 개(犬)의 목걸이도 금”이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황금나라 신라’를 둘러싼 갖가지 수수께끼는 1,5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왜 삼국 중 신라에서만 황금이 유행했을까. 황금나라의 상징인 금관의 주인공은 누굴까. 왜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지증 마립간·417~503년) 사이, 즉 100년도 안되는 짧은 시기에 불꽃처럼 폈다가 홀연히 사라졌을까. 10여년간 고분을 발굴하고 출토유물을 정리한 저자가 풀어내는 신라 황금의 비밀은 흥미롭기만 하다.

#금관이 왕, 혹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버리세요!=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은 황남대총(부부묘·남분과 북분)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왕비묘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夫人帶 명문 허리띠 장식이 출토)에서는 금관이 나왔으나 왕릉(눌지왕 혹은 내물왕?)임이 확실한 남분에서는 금관없이 금동관만 6점 출토됐다는 점. 하지만 왕족여성의 무덤(서봉총), 왕족소년의 무덤(금령총)에서는 금동관 없이 금관만 출토됐음을 유의해보면 수수께끼가 풀린다.

#금관은 장례용, 금동관보다 오히려 위상이 높다=황남대총 남분의 시기(425~450년 사이)는 황남대총 북분(450~475년), 금관총·서봉총(475~500년), 천마총·금령총(500~525년) 등에 비해 가장 빠르다.


그런데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6점(이 고분에 금관이 하나도 없음을 유의할 것) 가운데는 피장자의 머리부근에서 나온 곡옥(曲玉·굽은 옥) 달린 금동관이 특이하다. 이 ‘곡옥 금동관’은 나머지 5점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결국 나머지 5점의 금동관은 왕이 생전에 실제로 쓴 것이었고, 훗날 만든 이 ‘곡옥 금동관’은 죽은 뒤 장례용으로 묻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이 곡옥 달린 금동관이 훗날 화려한 금관제작의 모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금동관의 금관화라 할까. 저자는 또 하나 비밀의 열쇠를 푸는 단서를 제공한다.

#아차! 실수까지 방치한 금관=바로 금관총 금관이다. 이 금관에는 제작상 실수를 방치한 서툰 마무리 흔적이 엿보인다. 금관총 금관을 만든 이는 당초 두 줄의 구멍을 뚫어 옥이나 혹은 달개를 부착하려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두 줄 구멍은 그대로 놔두고 새로이 세 줄구멍을 뚫어 곡옥과 달개를 장식했다. 이는 명백한 실수다. 만약 왕이 생전에 이 금관을 실제로 썼다면 이같은 실수가 용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이 죽은 뒤에 ‘장례용’으로 묻었기 때문에 제작자는 이같은 중대한 잘못을 범했음에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또하나 금관은 예외없이 피장자의 머리쪽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머리 전체를 감싼 ‘데드마스크’ 형태, 즉 평상시에는 도저히 쓰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의 형태로 출토된다. 금관의 비실용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금동관이야말로 ‘살아서는 실용품, 죽어서는 장례품’이었고, 금관은 ‘순전한 장례용품’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현세의 삶을 내세까지…=나뭇가지와 사슴뿔, 곡옥, 새는 금관을 상징한다. 하늘을 향해 뻗어간 나뭇가지는 하늘로 통하는 통로를, 사슴뿔은 하늘의 정령(精靈)을 받는 안테나 같은 장치, 원초적 생명체를 뜻하는 곡옥은 죽은 뒤의 부활, 새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짓는 매개자로 각각 여겨졌다. 신라인들은 현세의 삶이 내세까지 이어진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 믿음 속에서 갖가지 황금유물을 무덤 속에 넣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황금유물의 기원을 직접적으로는 고구려, 간접적으로는 선비족(鮮卑族)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1만4천9백원.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